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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스 오브 뉴욕] 비열한 거리에서의 무의미한 생존 법칙
1. 드래프트 라이어츠
체류탄과 방사기, 그리고 화력에 의해 뿜어내는 뿌연안개 속에서 암스테르담은 그가 복수해야 할 상대, 빌 더 부처를 찾고 있다. 그러나, 어디에선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부처에 의해 상처를 입고 마는 암스테르담. 싸움은 불리했지만, 최종적인 승리는 카리스마라고는 전혀 없는 암스테르담에게 돌아간다. 폭도들과 그들을 진압하려는 군대들 사이에서 자신들이 빼앗긴 자리를 다시 되찾으려는 이민자와 원래 거주자였던 토박이와의 대결은 그렇게 끝이 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장중하고 잔인하면서 스펙터클한 화면은 마지막 의문을 내게 던진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 싸움을 한 것인가, 복수를 위해서 싸움을 한 것인가, 명예를 위해서 싸움을 한 것인가? 명확한 해답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어찌됐든 그런 의문이 던진 여파는 내게 풀리지 않을 듯한 과제로 남았다.
2. '파이브 포인츠'에서…
1846년 뉴욕 파이브 포인츠. 토박이라고 불리우는 빌 더 부처 세력과 이민자로 불리우는 발론 신부 세력간의 대결은 영화의 오프닝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보여주는 잔인성은 이미 영화의 전반을 이끌어가는 대상을 암시하듯이 냉혹하고 냉철하기만 하다. 발론의 아들인 암스테르담은 고아원으로 보내지고 16년 후, 복수를 다짐하며 파이브 포인츠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는 어릴 때 자신을 도와준 친구 잭의 도움으로 빌 더 부처에게 가장 신임을 받는 부하로까지 성장하게 된다. 정체성의 혼란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암스테르담은 잭과의 대화에게 그저 살고 싶을 뿐, 이라는 의미있는 말을 던진다. 생존을 목적으로 이주민들이 뉴욕으로 들어왔듯이, 암스테르담의 목적은 어느 순간부터 "복수"가 아니라 "생존"으로 변질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첫번째 정체성의 혼란이요, 의문이다. 그러나, 간간이 보여주는 빌 더 부처와 암스테르담의 갈등은 부처의 잔인한 폭력성을 암스테르담이 인식함으로서 심화된다. 은근슬쩍 권력에 기대고 있는 암스테르담을 통해 보여주는 세계는 기회주의적인 인간상이다. 그리고, 빌 더 부처가 보여주는 세계는 가진 자의 횡포이자 권력의 횡포다. 제니와 암스테르담, 그리고 부처와의 삼각관계는 암스테르담으로 하여금 빌 더 부처에게 복수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또한, 부처에게 암스테르담의 정체를 알리는 잭의 배신은 당시의 처절한 생존욕망을 보여준다. 그리고, 결정적인 도화선은 빌 더 부처가 제니에게 위험한 게임을 제안함으로서 이루어지는데, 이 부분은 다소 무리가 있는 전개로 보인다. 아마도, 많은 언론에서 떠들듯이 영웅적 카리스마가 부족한 디카프로오였기에 그럴는지는 몰라도, 암스테르담이 복수를 결심하는 계기는 제니 때문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암스테르담은 '영웅'이라기보다는 그저 그런 평범한 한 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빌 더 부처의 믿음직한 수하노릇을 하면서 그에게 안주하고 싶은 욕망을 느꼈고, 그로부터 묘한 부성애마저 느낀다. 아마도 제니가 없었다면 또 잭에 의해 그의 정체가 탄로나지만 않았다면 그는 계속 빌 더 부처의 수하에서 그가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라는 것도 잊은 채 살아갔을지 모를 일이다.
3. 생존을 위하여…
하지만, '영웅적 카리스마'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디카프리오이기 때문에, <타이타닉>에서 사랑하는 여자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그의 역할처럼 이번에도 제니 때문에 복수를 다짐하게 되는 역할을 맡게 된다. 하지만, 암스테르담의 감정이 도화선이 되어 복수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지만, 제니는 사랑에 목숨거는 타입은 아니다. 그녀 역시 생존을 위해 빌 더 부처에게 의지했고, 그에게 버려진 후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한 기구한 여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자신이 영웅이 되고자 하는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처절히 투쟁하는 일반 노동자요, 일반 서민인 것이다. 암스테르담이 복수를 하게 되는 계기 역시 이런 생존의 방식에서 빗겨날 수 없었으며, 이는 빌 더 부처에게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오직 생존을 위해 싸워야만 했던 당시의 시대는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폭력을 요구했으며 때로는 살인도 불사했다. 영화의 후반부에 들어서 몽크를 죽인 빌 더 부처의 행위는 그러한 생존방식의 한 형태다. 등 뒤에서 도끼를 던진 행위는 비겁하지만, 어떻게든 사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했던 그 당시를 비추어 본다면, 빌 더 부처의 행위는 정당하진 않지만 합리적인 행위로 비쳐진다. 그리고, 몽크의 죽음은 결국 최후의 대결을 위해 암스테르담이 그에게 도전하는 계기가 되고 빌 더 부처는 이겨야 본전인 이 싸움을 받아들인다.
4. 무의미한 생존의 법칙
다시, 드래프트 라이어츠로 돌아가면 암스테르담과 빌 더 부처의 싸움은 남북전쟁 당시 징병에 반대하는 폭도들과 그들을 진압하려는 군대들의 무차별한 총격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영화는 그들의 싸움을 무의미하게 희화시켜 버린다. 이미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징병되거나, 또 군대에 의해 진압되는 상황 속에서 그들 중 누군가가 싸움에서 이긴다고 해도 결국은 복수를 했으냐 안 했느냐의 결론적인 얘기만 도출될 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의 열린 결말은 앞서 던졌던 질문,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 싸움을 한 것인가, 복수를 위해서 싸움을 한 것인가, 명예를 위해서 싸움을 한 것인가? 에 대한 질문의 가치를 희석시켜 버린다. 이 영화는 시대극의 전형적인 플롯인 복수극을 취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드라마를 끌기 위한 부수적인 장치일 뿐 실제로는 이 복수극을 통해 시대적 상황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거기에 어떤 주관적인 관점이나 가치, 또는 철학적인 사상을 담아내지도 않는다. 담담하고 건조하게 전개되는 이 영화는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을 그리면서도 생존을 위협하는 더 큰 존재(빌 더 부처가 아닌)들을 영화의 곳곳과 결말에 배치함으로서 생존의 투쟁을 위한 잔인한 폭력성을 무의미한 것으로 환원시켜 버린다. 표면적으로는 암스테르담이 빌 더 부처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그들이 싸움을 하는 것이긴 하지만, 빌 더 부처에게 있어서는 이제 더 이상 자신에겐 희망이 없는 시대에서 죽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영화의 결말이 주는 이런 아이러니한 설정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보다 직설적이고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감독의 의도를 다분히 읽을 수 있으며, 그럼으로서 이 영화는 보다 확실한 세계관 - 비열한 거리에서의 무의미한 생존 법칙- 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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