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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목]부탁합니다. 제발 그남자의 사랑을 왜곡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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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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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se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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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25 오전 4:36: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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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알모도바르의 모든 영화를 별점의 차이를 주어 각각의 우열순위를 구분해낸다 것은 실로 불가능한일이다. 초기작부터 최근작들까지 이 위대한 거장의 모든 작품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에너지와 허를 찌르는 기막힌 유머 그리고 인간의 추함마저 아름다움으로 변모시키는 위대한 포용력으로 넘쳐난다. 단한순간의 좌절마저도 끝내 희망의 결과로 부활시키고 마는 그의 영화는 인간을 구원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의 위대함을 노래한다.
2002년 타임지선정 최고의 영화로 뽑힌 그의 신작 "그녀에게"는 기존의 그의 작품들에서 보여주었던 키치성향의 (원색감의)비쥬얼, 섹슈얼리티의 다양성에 대한 논의가 과감하게(이것은 분명, 과감한 택이다. 적어도 그에게는,) 삭제된, 페드로알모도바르의 영화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영화로 기억될 듯 싶다.
영화와 영화사이에 불현듯 나타나는 감독이 스스로 만들어낸 무성영화속의 성적판타지는 경이로운 상상력으로 영화광들을 절망시키고, 피나보쉬가 안무와 공연을 맡은 [카페뮬러](감독의 전작 [내어머니의 모든 것]속, 아들의 방에 걸려있던 공연포스터는 바로 [카페뮬러]의 공연포스터이다,)와 [마주르카포고]가 관객에게 전해주는 감정의 이변은, 이 영화가 얼마나 뛰어난 감성의 소유자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가를 철저하게 증명해낸다, 신파와 보편성. 작위적인 결말등을 예견하게 끔했던 두 식물인간 여성에 대한 숭고한 두남자의 사랑이야기는 그러한 우리들의 얄팍한 계산이 얼마나 멸시받아 마땅한지 다시한번 이야기한다. (그만큼의 멸시를 받아 당신의 영화를 이해하고 당신의 사랑을 흉내내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우리는 언제까지 더 많은 사랑을 하고 언제까지 더많은 이별을 하고 언제까지 더 많은 걸작들을 보아야 당신처럼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건지 아직도 ...여전히 알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인물간의 관계고리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얼핏보면 영화는 식물인간이 되버린 연인을 사랑하는 두남자의 변치않는 위대한 사랑의 가치만을 노래하는 것 같지만, 이 위대한 거장은 각 인물들의 아주 오래된 연애관계의 기억조차 훌륭히 꺼내와 현재와 연결시키고(이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가 결코 그러한 기억을 잊을리 만무하므로.)현재의 애인은 그 연애에 대한 기억을 지워줄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게 끔 만든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현재의 애인은 남자친구의 과거의 여자의 결혼식에 가서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결혼식의 숭고함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는 여자의 직언은 남자의 기억을 순간에 파괴시키는 위대한 발언이다.(이러한 이해관계를 만들어내는 감독을 나는 일찍이 한번도 본 적 없다.)
자, 이 커플이 바로 여성 투우사 리디아와 기자 마르코다. 리디아는 마르코의 10년의 기억속에 자리했던 여자의 자리를 증오하며 잊으라고 종용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과거애인과의 관계를 말끔히 청산하지 않는다. (물론, 청산될수 없다. 그녀는 아직도 그를 증오하고 있다. 증오하는 한 그녀는 그를 잊지 못한다.) 투우경기중의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리디아의 곁에 머무는 마르코의 존재는 그녀가 식물인간이 되기 전보다도 더욱 축소되어있다. 이미 그녀의 곁에는 그녀를 지키겠다고 다시 돌아온 그녀의 전 애인이 앉아있다.
영화는 마르코와 극렬하게 대비되는 베니그노를 등장시키므로서 이야기를 새로운 국면으로 몰아간다. 식물인간이 된 알리샤의 간호를 맡고 있는 베니그노는 자신의 유일한 사랑을 간호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충분히 행복하다. (나는 아직까지도, 알리샤의 비오는날의 사고가 의심스럽다. 감독은 여전히 노출시키지 않고 나의 궁금증을 자극한다. 알리샤의 사고를 일으킨건 베니그노였을까. 아니었을까.) 그녀의 육신을 완전히 독점하고 있는 그에게 그녀는 온전한 사랑의 대상이다. 그녀의 무의식(코마)상태는 베니그노에게 장애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더욱 온전하게 돌볼수 있는 완벽한(Perpect!!!) 계기일뿐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베니그노의 의식세계를 한번,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5년간 간호해왔던 어머니의 존재와. 이제 4년이 다...되어 가는 알리샤의 간호는 그가 여성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소통이며 수단이다. 페드로알모도바르감독은 그의 전작 [내어머니의모든것]에서 보여주었던 모성을 그리워하는 아들의 결핍된 자화상을 [그녀에게]에서도 그려낸다. 베니그노의 결핍으로 가득찬 자의식은 누군가를 보살펴야만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해나갈 수 있는 아가페적 애정의 형태로 점차 변화되어 간다. 역설적인 상황은, 내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그려진 모성애는 [그녀에게]에서 "남성"이라는 주체가 완전히 뒤바뀐 상황에서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역설적인 것은 그 주체가 바뀌든 바뀌지 않든, 아니 오히려 바뀐상태의 베니그노가 그려내는 사랑은 모성애의 그것보다도 더욱 완벽하고 더욱 위대해진다는 뜻이다. 결국, 사랑에 대한 감독의 감성은 그 시대와, 대상, 상황을 모두 뛰어넘어 너무나 완벽하하게 순수하기에(나는 그의 영화를 보면서 처음으로 완벽하게 순수하다는 문장의 의미를 아주 본질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아름답고 위대하다.
[그녀에게]의 수동적이거나 피동적인, 두 가지 모습의 여성은 그 시작과 결말에서 극적인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을 당혹케 한다. 투우사였던 리디아의 역동성은 그녀의 죽음으로 귀결되고, 코마상태였던 알리샤는 다시 춤을 춘다. 이 기막힌 이야기 구조의 알레고리는 여전히 "운명"으로 묶여 있다. 그러니까 여성투우사였던 리디아가 결국 그렇게 사랑했던 남자가 청혼하는 순간 식물인간으로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조금도 원치 않았던 남자
에 의해 보호받고 그남자의 아이마저 임신할 수밖에 없었던 알리샤의 기억에서 완벽하게 지워진 베니그노의 존재를 무시해버린채 (그녀는 자의던, 타의던 베니그노를 기억하지 않는다. 너무나 절망적이지만!) 다시 춤을 추기 위해 생명을 얻는 알리샤의 상황은 끝에서 맞물린다. 단 한순간의 앞일이 예상되지 않는 인간의 삶에서 여전히 인간을 구원해 줄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 알리샤가 기억하든 기억하지 않든 알리샤는 코마상태에서 마저도 베니그노를 살게 해준 "사랑"의 근원이며, 10년간 마르코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옛애인은 어떤 방법에서건 마르코를 10년간 살게 했던 "사랑"의 근원이며, 다시한번 알리샤를 살게 해줄 마르코의 존재는 이제 앞으로, 알리샤를 살게 해줄 "사랑"의 근원이다.
이렇게 [그녀에게]는 일반적인 "사랑"의 고결함을 노래하는 멜로드라마의 타이즈를 지향하고 있는, (동시에)페드로알모도바르의 가장 쉬운 방법으로 그려진, (동시에)가장 일반관객에게 불편하지 않게 다가갈, 그러면서도 단 한순간의 주제의식에 대한 초점이 흐려져 있지 않은 "운명"과 "사랑"의 고결함을 노래하는 영혼의 아리아다. 페드로알모도바르의 영화에서 우리가 매번 느끼는 다양한 형태의 당혹감은, 물론, 당신을 불편하게 할런지도 모르고, 동시에 매우 행복하게 할런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매번 행복하다.
언젠가...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만약, 이 위대한 거장의 영화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주변에 존재하는 셀 수 없는 다양성에 대한 나의 사적인 반응이 이토록 담담해질 수 있었을까. 다른 모양의 그릇에 담겨있는 타인의 사랑에 대해 어렵지 않은 경외심을 갖출 수 있었을까. 다른 형태의 성취향을 가진 타인의 삶에 비뚤어지지 않은 잣대를 가질 수 있었을까. 어느순간, 그의 영화는 나를 겸손케 하고 나를 성숙케 하고 나를 반성케 하고 있었다. 한편의 위대한 영화는 많은 이들의 삶을 바꿔놓는다. 페드로알모도바르의 영화가 바로 나에게 그렇다. 매번 너무도 쉽게 오만해지는 나의 삶은 그의 영화를 통해 조금씩 겸손해진다. 내가 옳다고 주장해 온 하잘것없는 삶의 모퉁이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들이 타인에게 입혔던 상처들과, 왜 나만큼 많이 사랑할 수는 없었냐고 외쳤던 철없던 시절의 아우성은 거장의 영화 앞에서 일순간에 침묵된다. 나의 사랑은 위대하지 않았다. 여전히 반성해야 하고 여전히 희생되어져야 하며 완전하게 나를 소멸시켜야만 한다. 그런 후에 누군가를 사랑했었다고 아주 조용히. 나즈막히 누군가에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우리의 욕심을 비웃고, 우리의 허영을 들춰내고, 우리의 이기심을 찢어내는 반성의 계기다. 사랑은 이토록 위대한데, 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고, 누군가를 사랑했었다고 떳떳하게 이야기 하느냔 말이다. 사랑은 이토록 위대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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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2002, Talk to Her / Hable Con Ella)
제작사 : Good Machine, Antena 3 Television, Via Digital, El Deseo S.A. / 배급사 : 판씨네마(주)
수입사 : 판씨네마(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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