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이
갑자기 편지 보내는 거 용서해 주길 바래.
그리고, 아마 이 편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내는 아주 긴 편지가 될 거라는 것도.
나는 지금. 우메가오카의 아파트에 있어.
피렌체에서 도망쳐나와, 그래. 도망쳐 나와 일본에 돌아온지 얼마 안돼.
오늘, 오랜만에 시모기타에 갔다왔어.
너를 만난 그 곳이지.
그 거리, 그 가게에서 우리는 스쳐 지나갔지.
말도 나누지 않은 한순간의 스쳐지나감을 나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는지...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 너는 의아해 했지만 나는 그 미술관에
이전부터 자주 다녔었고, 그곳 안내창구에 여자애가 온 것도 알고 있었고,
그 애가 아르바이트라는 것도, 학부는 달라도 같은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 애가 항상 외톨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혼자있는 것에 냉정해질 수 있는 여자. 나는 네가 정말 강한 애라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실제의 너는 달랐어.
외로워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지만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한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어.
그때 우리는 둘다 스무살이었고, 아직 어린애같았어.
하지만 왜 그렇게 두근거렸는지...
처음 걸려온 너의 전화. 첫데이트의 약속.
만나던 찻집. 처음으로 함께 본 영화.
마음에 드는 음악이랑 책이 있으면 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너에게 알려줬지.
우리들은 많은 얘길 나눴었지.
너의 어린 시절 이야기.
너의 아버지는 일본인이고 그래서 너는 아오이라는
일본 이름을 갖게 된 것. 그 아버지가 일찍 사고로 여의고
어머니의 재혼상대 가족과 살게 되었고 넌 아무리해도
정을 붙이지 못했다는 것. 줄곧 고독했었다는 것.
조국을 알고 싶어서 유학을 결심했다는 것.
너는 자신이 머물 곳을 찾고 있다고 했지.
처음으로 네가 내 방에 들렸던 날. 그날 밤, 난 밤새 네 생각을 하느라 한숨도 못잤어.
너와 함께 보낸 그 때의 모든 것이, 변하지 않고 남아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우리가 만나던 찻집은 지금은 철거되고 새로운 건물로 변해버렸어.
그 중고 레코드점도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고. 그 거리에는 이제 없어.
기억하고 있어? 우리가 즐겨찾던 대학 기념강당의 옆 콘크리트 계단에서
첼로를 연주하던 학생이 있었다는 걸.
항상 똑같은 곡의 항상 똑같은 부분을 틀리던,
그 학생의 서툰 첼로 연주에 우리는 웃었었지.
처음 키스한 그 장소에서, 그 때 들었던 곡목을
아오이. 나는... 이젠 잊어버렸어.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이야기. 그래... 이젠 지난 이야기야.
끝까지 읽어줘서 고마워.
밀라노까지 너를 만나러 갔을 때, 어른스럽게 행동하지 못한 나를,
지금은 몹시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어.
미안했어.
함께 살고 있는 남자 친구에게도 안부 전해 줘. 잘 지내.
마지막으로. 네가 행복해서 다행이야.
멀리 밀라노의 아오이에게
이제는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는, 쥰세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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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있는 것에 냉정해질 수 있는 여자. 나는 네가 정말 강한 애라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실제의 너는 달랐어.
외로워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지만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한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어."
위의 대목이 가장 인상깊었는데.. 혼자였던 시간이 긴 사람들은 두가지 양상을 차례로 거치지 않나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의지를 하는 단계에서 그 의지대상이 사라졌을때 자력으로 일어나기 힘들어하다가 결국에는 스스로 강한척 하는 단계까지... 비약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여집니다...적어도 내 경험안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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