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벌>의 영화 속 시간은 한 달 남짓한 짧은 기간이지만, 그것이 결과한 우리의 역사는 오늘도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다. 국가의 명운을 건 대회전 '황산벌 전투'는 오늘도 우리의 뇌리에 강렬하게 살아남아 아직도 강인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황산벌>은 우리가 그 동안 익숙해 있던 역사적 사실, 혹은 그것과 결부되어 있었던 몇몇 일화들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참신한 기획이자 실험으로 보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영화작가 이준익은 '민족자주'를 저 깊은 흉중에 감춰두고 등장인물들에게 전쟁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피력하도록 한다.
전쟁의 원인 제공자인 김춘추는 의자왕에 대한 사적인 원한으로 치를 떠는 인물로 그려진다. 대야성에서 사위와 딸을 한꺼번에 잃은 그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백제를 멸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하는데, 그런 연유로 당나라와 연합하는 그에게 선뜻 동조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더욱이 '전후처리협상'에서 수세적인 위치로 몰리는 김춘추는 매우 허약한 자주의식을 드러내며, 그의 둘째 아들 김인문은 대놓고 당나라 신하임을 자청한다. 때문에 백제 멸망 이후 의자왕마저 제손으로 처리하지 못하는 김춘추의 한계는 특별히 이상하게 비쳐지지 않는다.
김춘추와 처남매부 사이인 김유신은 뜻밖에도 적장 계백을 두려워하는 나약한 장군의 형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는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이다"는 명언을 남긴다. '거시기'의 해독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는 그의 모습은 비장하다 못해 희화적이기까지 하다.
승리와 생존을 위한 그의 처방은 "미치지 않고서는 전쟁을 할 수 없다"는 것이며, 여기서 화랑들의 필마단기 '자살특공대'가 그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 나이 어린 자살특공대의 피 위에 이루어진 황산벌 전투의 승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로 아내와 세 아이를 죽이고 출정한 계백은 시끌벅적한 웃음판의 영화 <황산벌>에서 시종일관 웃음기 없는 강력한 무장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의자왕의 속마음을 대번에 읽어내고, 무력까지 동원하여 목적을 관철하는 그에게는 국가주의의 허무와 비장함의 향기가 그윽하다.
다른 한편으로 최후의 항전과 패배에 이르기까지 한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는 계백은 생명보전을 위한 피신 대신에 부하장졸 '거시기'를 선택함으로써 인간애의 도저한 양상을 드러내 보인다. 이런 양상은 의자왕의 비겁한 41명 왕자들과 대비됨으로써 매우 강력한 여운을 남긴다.
계백의 '이름에 대한 집착', 즉 명예욕은 김흠순과 김품일을 통하여 저급하게 패러디되고 있다. 그들은 조속한 승리를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던 김유신의 사주를 받아 자식들을 사지로 내보내는 비정한 아버지의 형상을 대표한다.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의 아들 반굴은 섬섬옥수 백색미남의 형상이며, 도대체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허망하게 말발굽 아래 쓰러진다. 대야성주 김품석의 조카이자 장군 김품일의 아들인 관창은 자살과도 같은 죽음을 통하여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려는 열망에 사로잡힌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므로 <황산벌>은 이들 화랑의 죽음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과 새로운 의미부여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계백의 처는 <황산벌>에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여성으로 비중은 크지 않지만, 역할과 주제의식 전달 면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계백이 '이름'의 의미를 통하여 명예를 강조하자 그녀는 "바로 그 이름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고 지적하면서 전쟁의 무용함을 통렬하게 고발한다.
지아비로서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계백의 인간적인 결함과 부족함을 준열하게 책망하면서 그녀는 "그런 인간에게 도대체 전쟁이고 나라고 무슨 의미가 있는가"고 일갈한다. 그녀 말처럼 계백은 "만일 부모가 살아 계신다면 그들마저 제손으로 베고 출정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그녀에게서 나는 여성주의 뿐만 아니라, 인간주의의 입장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고귀한 인간이자 어머니의 형상을 본다.
그런데 <황산벌>에서 전쟁을 바라보는 영화작가의 시각은 무엇보다도 일반 병사들을 통하여 잘 드러나 있다. 대개 농사를 짓다가 출병한 그들에게 전쟁은 왜 싸워야 하는지 그 이유도 모른 채 언제나 죽음의 공포로 떨어야 하며,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움직여야 하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은 실제 전투장면에서 매우 실감나게 형상화되어 있으며, 바로 이것이 <황산벌>에 나타난 강력한 '반전의 모티프'이자, '민중주의' 시각이라 보인다. 그들에게는 살아남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며, 따라서 전쟁 없이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살 수 있는 평안한 나날을 고대하는 민초들의 바람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성을 상실하지 않았음은 너무도 자명하다.
안시성 전투에서 양만춘에게 패한 아버지 태종을 기억하는 당나라 고종은 동아시아의 패권장악에 걸림돌인 고구려를 침략하기 전에 교두보 확보를 위하여 신라와 연합한다. 소정방은 그런 고종의 충실한 하수인이며, 백제와의 전쟁을 마치기도 전에 신라와 '전후처리협상'을 시작함으로써 오늘날 미국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 '이라크 전후처리 문제'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강대국 중심의 패권주의를 구현하는 소정방과 그를 대하는 약소국 신라의 여러 인물들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외양만 바뀌었을 뿐 그 본질은 동일하다는 인상을 영화 <황산벌>은 관객들에게 매우 강하게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에서 '30년 전쟁'을 경험하면서 세 자식들을 차례로 잃어버리는 억척어멈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전쟁이 민중과 어떤 형태로 연결되는지를 선명하게 그려낸 바 있다. "인간은 역사를 통해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만 배운다"는 명제를 성공적으로 입증한 브레히트가 영화 <황산벌>을 본다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
영화작가는 '황산벌 전투'를 바라보는 여섯 가지 시각을 통하여 전쟁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으며, 나아가 그 전쟁 이후 이 땅에서 진행된 역사적 전변에 대한 이해의 단초를 제공한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영화작가가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민족자주'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연개소문과 김유신이 당나라 고종과 소정방을 상대로 보여주는 당당한 자세를 통하여 작가는 오늘의 우리에게 '자주의식'의 존재여부를 짧지만 날카롭게 묻고 있는 것이다.
<황산벌>에 나타난 옥의 티 한 가지. 계백이 살려준 농부 '거시기'는 "지금 고향에 돌아가면 나락이 다 익었을 겁니다"라고 말하지만, 막상 그가 고향에 돌아갔을 때는 이제 막 벼이삭이 패려는 시기였다. 누런 황금물결 넘치는 들판이 아니라, 초록빛 넘실대는 들판은 얼마나 나를 무색하게 하였던가.
현저하게 드러나는 이런 오류는 <황산벌>에 투여한 영화제작진의 노고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한 세부묘사가 무너지면, 설득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영화의 전체적인 틀거리도 깨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