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올드보이는 스타일리쉬하다. 짜임새있는 극적전개, 깔끔한 영상, 도발적인 색채 게다가 탁월한 연기력까지 대중성을 확보하기에 충분한 요소들이 잘 자리잡고 있다. 한마디로 재미있게 잘 만든 영화다.
하지만 말이라도 다 말이 아니다. 잘 다듬어진 미사어구로 세련되게 발해지는 말이라고 해서 다 말이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어떤 예술가들, 구체적으로 적지 않은 영화인들은 자신들에게 절대 자유를 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제 방에서 혼자 틀어놓고 즐길 것이 아닌 이상, 관객에게 공개적으로 선보이는 이상, 저 홀로의 무한자유를 주장할 수는 없다. 사회, 문화적 맥락 속에 영화를 내 놓는 의도 자체가 그만큼의 권리 이상의 책임과 의무도 감내해 내겠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러기에 영화라고 다 영화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영화 올드보이가 근친상간을 소재로 삼았다고 해서 이러는 거 아니다. 뭐가 그리 충격적이고 도발적인 소재, 극적인 반전이라는 말인가? 이미 6천년 전 그리스에서 극작가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에서, 아이스킬로스가 엘렉트라에서 다 써 먹었던 플롯이다. 그걸 모방과 조작의 달인들이 니뽄스타일로 버므려 만든 혼합잡탕을 한국의 박찬욱 감독이 특유의 깔끔한 솜씨로 치장해 내었을 뿐이다. 좋다. 먹을 만하다는 거, 그래서 6천년 전 그들의 솜씨 못지 않게 만들었다는 거 부정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6천년 전 그들은 반인륜적인 근친상간의 죄악을 운명적으로 범하게 되었다는 끔찍한 사실을 깨달은 외디푸스가 제 눈을 꼬챙이로 터뜨리게 하였다. 이를 통해 사람이 해야할 짓과 하지 말아야 할 짓, 또 하지 말아야 할 짓을 범한 자에게 어떤 고통과 고난이 주어지는가를 교훈함으로써 짐승의 길과 다른 인간의 길을 말하였다.
6천년의 시간이 흐른 지난 지금 우리는 짐승의 길이나 인간의 길이나 그 길이 그 길이라는 유물론적이고 생물학적인 논리와 이론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이 되었다. 영화 '올드보이' 쯤은 넉넉한 아량으로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는 개화된 문화인이 된 것이다.
오대수(최민식)의 가위로 혀를 잘라내는 잔혹한 회심은 오히려 문제가 아니다. 혀가 아니라 눈을 도려내면서까지 토해내고픈 죄악의 통한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못자를까.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복수가 이루어지고 교훈이 전달되었으므로 이루어지는 이우진(유지태)의 자살이다. 이우진이 오대수에게 깨닫게 한 것은 무엇인가? 그가 그토록 처절한 복수를 통해 가르친 것은 무엇인가? 근친상간이 사랑의 범주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정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를 윤리적 잣대만으로 재는 것은 대체로 어리석다. 극적 맥락을 상실한 채 오직 윤리로서만 그 가치의 유무를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사회와 윤리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어불성설이다. 윤리만으로 평가는 부당하나 윤리적인 요소에 대한 평가 자체를 부정하는 것 역시 부당한 태도이다. 영화가 사회, 문화적 맥락에 처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에 상응하는 사회, 문화, 윤리적 책임 역시 피할 수 없다.
박찬욱은 올드보이를 빙자하여 말한다. 작은 돌이든 큰 돌이든 가라앉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사소한 말장난도 목숨을 걸고 할 정도로 조심하라고. 이 박찬욱 말씀은 제 자신에게 먼저 적용되어야 마땅하다. 이런 영화로 장난질하려면 제 목숨 먼저 걸고 칠 것이다.
영화 올드보이. 한국영화가 기술적으로 또 미학적으로 많이 진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의식은 6천년전보다 더 멀리 퇴보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보여준다.
* 사족 : 인간의 의식을 조작하기 위해 자주 등장하는 최면술의 설정은 이 영화가 얼마나 빈곤한 창의력에 의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무리 만화를 원작으로 했다기로서니 주인공들의 운명적인 행동을 야기시키는 '조작'이 고작 최면술이라니 박찬욱 감독이 벌써 너무 게을러진 것이 아닐까? 혹 내용이 아니라 스타일로 대충 넘어가겠다고 만들었다면, 박찬욱, 관객을 너무 얕잡아보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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