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장화, 홍련이다.
분명 고전의 제목을 그대로 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고전을 토대로해서 현대적으로 생각해봤다.
고전소설에서는 이 영화는 지극히 가부장적이다.
물론 새엄마가 전형적인 악인으로 나온다.
피해자는 장화와 홍련.
여기서 아빠는 거의 제삼자의 역할이다.
처음부터 이 야기는 두 딸과 새엄마의 대립이며 아빠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새엄마가 두 자녀를 괴롭히고 결국 죽음에 까지 몰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그런 새엄마의 잘못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조금만 더 두 자녀들에게 관심을 가졌더라면 죽음까지는 아니였을 것이다.
분명 자녀들에게 무관심한 아빠의 책임과 잘못이 있는 것이다.
결국 죽은 딸이 혼령이 되어 새엄마를 벌하게 된다.
모든 고전소설에서 그러하듯 아빠의 잘못은 전혀 언급되지 않으며 악인은 무조건 새엄마 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빠는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너무 무책임하다.
새로운 애인의 교활한 이중성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며,
그로 인해서 괴로워하는 아내라든지, 자녀에 대해서 너무 무신경하다.
그런 아빠때문에 엄마는 자살하고 그것으로 동생까지 죽게 된다.
그 후 주인공 수미는 엄마의 자살과 동생의 죽음이 자신때문이라는 죄책감으로.
정신분열이 일어나고 새엄마라는 또다른 개체의 자신을 만들어 책임전가를 한다.
이렇게 수미가 괴로워 하는 것에 반해 정작 모든 사건발달의 원인인 아빠는 너무나 무신경하다.
단지 수미를 환자로 취급할 뿐 조금도 이해를 하려 하지 않는다.
병든 아내에게 무신경했듯이 말이다.
수미가 왜 자신에게 반항하는지, 왜 새엄마로 착각하는 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조금의 대화도 혀용하지 않는다.
수미와 또다른 자신인 새엄마, 자신의 환상속의 가공의 인물 수연.
이렇게 세 사람이 수미의 환상속에 자리잡고 있을 때, 아빠는 없다.
수미 혼자서 마음껏 상상할 동안 아빠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쁜 아빠조차도 될 수 없다'라는 것이다.
단지 내 생각일 뿐이지만, 이를 통해서 고전에 묻혀있던 무신경한 아빠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킨 것 같다.
그리고 근친상간이라고 했던 새엄마(수미)와 아빠의 잠자리라든지, 아빠의 속옷을 챙겨주는 행동이라든지..
이러한 장면들은 수미가 이렇게 정신적으로 혼동하고 있을 때,
아빠로서 딸을 이해하고 고치려고 하는 노력보다는..
단지 적당하게 응해주고, 그 상황에서 약을 건내줌으로써 단지 그 시간을 외면하려고 하는 듯 했다.
끝까지 무신경하게 말이다.
고전의 장화,홍련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아빠의 잘못을,
현대로 재구성함으로써 좀 더 부각시켜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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