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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 구라의 끝은? 그녀를 믿지마세요
emptywall 2004-02-18 오후 1:16:29 909   [1]



구라를 유난히 잘 치는 친구 녀석이 있었습니다. 구라라는 말이 일본의 쿠라마스(晦ます: 속이다)에서 왔다는 것을 알기 휠씬 전인 단지 이 단어가 ‘거짓말’의 사촌쯤으로 막연하게 생각되던 그 시절, 저는 이 친구의 말 한마디 마디마디에 기가 막히게 속아 넘어가곤 했습니다. 어느 날 100원 짜리 동전 하나만 생겨도 학교 앞 문방구에서 50원짜리 뽑기 두 판으로 요행을 바라는 그 친구 녀석이 ‘땅 파면 돈나오니?’라는 어머니의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현장에 있던 저에게 땅을 파도 돈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더군요. 흙이 묻은 동전을 보여주며 친구 녀석은 “방방(위에 올라가 뛰어노는 놀이기구의 일종) 밑에 가면 땅속에서 돈을 캐낼 수 있다”는 꽤 과학적인 논리로 저를 꼬여내었습니다. 그 탓에 이박회(耳薄會:귀가 얇은 사람들의 모임)의 자랑스러운 회원인 저는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땅을 파곤 했었죠. 그 친구와 반반으로 나누기로 하고 말입니다. 물론 그 녀석이 보여준 동전이 일부러 시궁창에 비비적댄 자기 돈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전까지지만요.


제 이런 황당한 추억을 되새기게 해준 계기는 지금도 한창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라이어]라는 연극을 통해서였습니다. 우연히 한 거짓말로 인해 상황은 꼬여만 가고 할 수 없이 본의 아니게 계속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의 에피소드를 다룬 이 연극은 한 시간 반 정도 되는 공연시간 내내 쉴새없는 ‘구라’가 이어집니다. 구라의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처럼 얼핏 내뱉은 거짓말로 인해 주인공의 처지는 갈수록 궁색해집니다. 간신히 구라위에 거짓말을 얹혀가며 버텨가지만 결국은 파국 아닌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웃음과 더불어 한편으로는 어디선가 또 누군가를 속이고 있을지 모르는 친구가 생각나 연민의 감정을 느꼈기도 했었죠.


배형준 감독의 입봉작 <그녀를 믿지 마세요>는 제 추억의 연장선에 있었습니다. [영주-김하늘]는 세상의 문법을 꿰뚫었다고 자신하는 발칙한 사기꾼입니다. 교도소에서조차 바지런한 행동으로 환심을 산 뒤 심사관 앞에서 눈물 연기로 가석방 심사를 가뿐히 통과하지요. [네오]가 매트릭스의 구조를 알고 있다면 [영주]는 이 세상의 원리를 알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시골 약사 [희철-강동원] 때문에 본의 아니게 사건의 복판으로 뛰어들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용강이라는 시골 마을 전체를 상대로 한 사기극이죠. 툭 내뱉은 한 마디가 구르고 굴러서 한 마을의 사람들 전부가 믿게 되는 진실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흥미롭습니다. 인터넷이나 핸드폰보다 미용실과 온천에서의 수다가 더 영향력있는 정보가 되는 시골에서 [영주]의 말 한마디는 쉽게 진실이 됩니다. 거짓말과 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은 인심 좋은 마을 사람들과 순박한 가족이지만요. 영화는 이런 과정을 통해 사기꾼 [영주]가 그들과 동화되어 세상을 깨닫고 한층 성숙해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의 묘미의 핵심에는 아귀가 잘 들어맞는 상황의 전개와 맛깔스러운 대사가 있습니다. 영진위 시나리오 공모전 당선작인 ‘비둘기 둥지위로 날아온 뻐꾸기’를 원안으로 각색된 시나리오는 기가 막힌 상황 전개의 원동력이 됩니다. [영주]가 생전 처음 보는 [희철]의 애인 행세를 할 수 있게 되는 계기와 그녀가 받는 오해의 대부분은 이 상황들의 앙상블에서 나옵니다. 또한 장면마다 등장하는 튀는 대사가 추임새 구실을 톡톡히 합니다. 일순 진부해 보일 수 있는 설정에서 튀어나오는 대사들은 웅얼거리는 독백일지라도 놓칠수 없게 만듭니다.


영화의 또 하나의 볼거리는 생동감있는 캐릭터들과 배우들의 연기입니다. <동갑내기 과외하기>로 청순가련형의 연기를 탈피했던 김하늘 씨는 한결 여유로운 코미디 연기를 구사합니다. 스스로 촬영장에서도 푼수짓을 했다고 공언하는 그녀는 분명 영화의 ‘드러난’ 공로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반면 치매 걸린 할머니로 분한 김지영 씨는 ‘숨은’ 공로자입니다. 일설에 따르면 시나리오 상에서조차 비중이 크지 않았던 배역이었음에도 주인공의 극적인 캐릭터 변화를 자연스럽게 만들어주는 캐릭터로 재구성 해냈기 때문입니다. TV 드라마에서 쌓아온 능청스러운 애드립으로 영화 속에서 윤활유 역할을 확실히 하고 있는 셈이죠.


그러나 <그녀를 믿지 마세요>는 ‘웃다가 울리는’ 코미디 공식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느새 한국 코미디의 흥행공식이 되어버린 ‘先웃음,後감동’에 슬그머니 편승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두 커다란 국면사이에 연결고리가 헐거워 보인다는데 있습니다. 전반부에는 [영주]의 짜임새있는 사기행각이 주가 되지만 중반 ‘고추 총각 선발대회’로 인해 급물살을 타기 시작합니다. 대회 준비과정을 통해 주인공인 선남선녀 [영주]와 [희철]사이에 애정이 싹튼다는 것은 당연히 예견된 일이지만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혹스럽습니다. ‘사랑은 갑자기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래서 그런가 보다라고 해야겠지만요. 하지만 이런 구조자체가 흥행확률이 높은 공식화된 코드에 무임승차하려는 것은 아닐까하고 의심이 들기도합니다.


<태극기>의 맹렬한 기세와 <실미도>의 후폭풍 속에서 개봉하는 <그녀를 믿지 마세요>가 어느 정도의 호응을 얻어낼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러나 흥행배우의 반열에 오른 김하늘 씨와 젊은 여성들의 아이콘으로 부상하고 있는 강동원 씨가 선봉에 서고, 관록있는 배우들의 든든한 후방지원과 잘 짜여진 전술(시나리오)이 있으니 대작들의 틈새를 공략해볼만 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영화는 매일같이 터져나오는 숨막히게 답답한 이슈들의 홍수 속에서 잠시 여유를 부리며 쉬어 갈 수 있는 그런 영화니까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만큼이요.



<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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