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북전쟁이 진행 중이던 1864년 7월의 ‘크레이터 전쟁’은 6300여명의 목숨을 한 순간에 앗아갔다. 순식간에 터진 대형 폭탄은 검은 버섯구름을 만들어내고 순식간에 전쟁터를 아비규환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곧 이어진 북군과 남군의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전쟁은 단시간에 전쟁의 참혹함을 전해주기에 충분하다. 1860년 ‘노예해방’을 중심으로 지역적인 경제적 대립과 곧 이어진 두 당간의 정치적 대립으로 미국은 내전에 돌입하게 되고. 이는 지역갈등을 조장하고 형제애를 버리고 내부의 적을 양산하게 된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비장한 각오가 필요하다. 61만여명이 죽은 남북전쟁의 경우는 미국인들 자국인들에게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고 상처이다. 역사는 과거를 기억하고 기술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보듬고 과거로부터 배움을 얻는 것이다. 이 영화는 죄를 묻기보다는 과거를 보듬는 영화이다.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 사막이라는 장소에서 전쟁의 참혹함과 그 속에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그렸던 감독은 그 연속상에 이 영화를 두고 있다. 전쟁이란 인류의 죄악이라는 자명한 것에서 시작하여 그 참혹함을 인간의 가장 순수한 감정이자 정신인 사랑의 피해로 극대화 시키고 있다. 사랑이라는 고결하고 행복한 감정을 폭격한 전쟁은 인간의 육체보다도 정신을 황폐화 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 상실되고 비인간화 되어가면서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은 육체적 죽음만이 아니다. 남과 북 지리적으로 분단되어 대치하는 과정에서 그 소용돌이에 휘말린 인물들은 사랑을 잃어버렸다. 아니 사랑을 빼앗겨 버렸다. 전 국민을 하나의 끈으로 이어주는 형제애는 ‘적’이라는 내부의 괴물 때문에 사라지고 모성애는 타자에 의해서 살해당한다. 성애는 정신적인 사랑이 극대화 되어서 완성의 의미로 이어진다기 보다는 전시 상황에서 남성들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것으로 그려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다 그리움에 몸서리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그런 과정에서 희망은 사라져간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한달이 되어간다. 전쟁터에서 사랑은 말살 되어가고 있었다. 공간적인 단절은 정신의 단절을 유발하기 마련이다. 서로의 정신이 함께 호흡할 수 없는 전쟁이라는 인류의 재앙 속에서 그 사랑을 지켜나가는 두 주인공의 모습을 그린 아름다운 대 서사시....
인만은 남북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던 중 폭격을 당하여 부상을 입고 고향에 있는 에이다를 만나기 위해서 탈영을 하게 된다. 인만이 에이다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에이다가 루비와 함께 자립하여 살아가면서 인만을 기다리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이다. 영화는 전쟁의 발발 동기와 각 진영의 이데올로기와 목적을 전달하는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노예해방’의 초석을 다진 링컨 대통령은 영화 속에 등장하지 않으며 실지로 노예들에 대한 각 진영의 주장은 없다. 단편적으로 영화의 배경 역할을 하지만 영화가 비중을 두는 것은 그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상처를 받은 일반인들이다. 형제간에 총부리를 겨누게 된 것은 어쩌면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해관계 때문이다. 링컨이 스스로 노예해방을 부르짖으면서 자신의 노예는 해방시키지 않았던 것처럼 모순 된 지도부들의 행태는 자신들의 이익만을 노린 계산된 의도였을지 모른다. 이 전쟁의 피해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전쟁터에 빼앗겨버린 사람들이다. 아들이 전쟁터로 끌려가고 연인이 전쟁터로 나가는 상황에서 기다리는 사람의 가슴은 찢어진다. 한편 그 통렬함과 함께 전쟁이 만들어낸 비인간적인 사람들의 모습은 전쟁의 참혹함을 배가 시킨다. 식량을 약탈하고 부인을 강간하는 군인들의 모습과 의용대랍시고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고 만행을 저지르는 짐승적인 모습은 관용과 사랑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전투하고 있다면 전투를 멈추고 행군하고 있다면 행군을 멈추세요,”
인만은 사랑하는 에이다가 있는 콜드 마운 틴으로 돌아가고자 모험을 감행한다. 그 모험은 죽음을 담보로 하는 것이며 인만은 그 기회비용을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인만의 여정은 전쟁의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쟁터로 뛰어 들 때 보았던 승리에 도취된 분위기는 이내 공포와 불안으로 바뀐다. 인만의 여정은 곳곳에 비극적인 요소들을 산재해 놓고서 적과 적의 대립구도를 설정해 놓는다. 실지로 아군이란 말은 영화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남쪽과 북쪽이라는 지리적 구분 속에서 언뜻 아군과 적군은 명확한 듯하지만, 탈영자는 적으로 간주하고 그 탈영자를 숨겨주는 가족역시 연좌제로 인해 반역자가 되는 현실에서 아군이란 존재 할 수 없다. 전반적으로 적을 양산 할 수밖에 없는 아니 자기 이외에는 모두가 적이 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시사하는데 상당시간을 할애하는 영화는 후반부에는 상처의 치료를 보여준다. 무너졌던 인간의 신뢰는 인만을 구해준 노인에게서 얻을 수 있고 루비의 불신과 미움의 대상이었던 아버지와의 화해를 통해 모든 상처가 치료됨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에 대해서 알고 모르고의 정도가 아니다. 인만과 에이다가 처음만나서 사랑에 빠진다는 것에서 운명론적 사랑관을 엿 볼 수 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조건에 의한 것도 사회적 관계에 의한 것도 아니다.“서로의 느낌으로 알 수 있지 않나요 ?” “당신 말이 맞아요.” 라는 두 주인공의 대화처럼 이 영화는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진 두 남녀의 사랑을 너무나 애절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욕정을 억누르면서 한 사람만을 기다리는 것은 스스로의 자기절제와 사랑에 대한 확신에 기반한다. 현대의 사랑관이 상품화 되어버린 교환가치라면 두 사람의 사랑은 정신적 교감이자 서로에 대한 믿음이다. 인만이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에이다가 기다릴 수 있었던 것도 고귀한 사랑의 힘이있었기 때문이다.
“난 당신한테 돌아왔어.”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인만이 돌아오는 것은 전쟁의 종결을 의미하면서 에이다의 비극적 개인사의 페이지가 끝나감을 의미한다. 폭격당한 사랑의 아픈 기억을 찬찬히 되짚어 보는 이 영화 <콜드 마운 틴>은 모두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너지는 순간을 비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특히나 두 주인공이 만나는 과정까지 두 사람의 역경과 고난의 교차편집이 이루어지고 난후 마침내 길 위에서 하나가 되는 장면은 폭력과 살인으로 얼룩진 전쟁의 상처가 회복되어 가는 것을 보여준다. 비록 과거가 되어버렸고 흘러가버린 이야기이지만 , 영화는 개인이 겪은 큰 상처를 보듬으면서 상처를 만들어낸 전쟁이라는 대재난을 기억하고 그 상처를 보듬는다. 그로 인해서 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교훈을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