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은 옆 방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데, 그 동생이 죽어 병원에 있다고 경찰이 전화로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는, 동생과 똑같이 생긴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이 영화의 초반부는 전형적인 괴담입니다. 상당히 무서웠어요. 하지만 그건 반쯤은 속임수입니다. 이 영화는 사실 전혀 공포영화가 아니거든요.
구로사와 기요시는 아무래도 공포영화 감독으로 유명하고 그가 결정적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도 그의 공포영화 덕택이었기 때문에, 전 이 사람이 이다지도 유머감각이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습니다. 이 영화의 막판 20여분은 인공인체실험기계와 돈가방을 두고 업치락뒤치락하는 코미디였거든요.
하지만 초반의 으시시하던 분위기를 상실하고 나면 영화의 긴장감은 급속히 사라집니다. 이 영화의 가장 의외인 점은 구로사와 기요시가 '도플갱어'라는 유용한 호러 영화 혹은 '철학'의 소재를 왜 이렇게 싱겁게 다루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의 영화에 한꼭지씩은 들어가던 '불가해한 장면'도 이 영화에는 없구요. 재미는 있지만 뭔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저의 독해력 부족 때문이겠습니다만...
화려한 기교를 사용하지 않는 감독인데, 이 영화에서는 '드 팔마' 영화처럼 화면분할을 자주 보여줍니다. 팜플렛은 분열된 자아, 뭐 그딴 소리를 주워섬기지만 실상은 일인 이역에 소요되는 비용-CG라든가-을 줄이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야쿠쇼 코지는 언제나처럼 좋은 연기를 보여주구요, 난데없이 유스케 산타마리아가 등장하는군요. 그의 비실비실 이미지 때문에, 플롯 상 무척 위험한 인물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