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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 간만에 느껴보는 오싹함 알포인트
emptywall 2004-09-05 오후 9:26:37 2104   [6]


고등학교 시절 국사담당 선생님은 특이하기로 유명한 분이었다. 그분은 언성을 높이지 않고도 좌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인상적이었는데, 게다가 한 여름에도 내복을 입고 다니시기에 기인(奇人)으로 불리곤 했었다. 당신 스스로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한 적이 없었지만 주위의 동료 선생님들은 수업이 지루해질 즈음이면 국사 선생님의 이력을 각성제 삼아 풀어놓곤 했었는데, 그 이야기는 학생들 사이에서 소문으로 날개를 달고 퍼지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베트남전 참전 용사로 최전선에 투입된 수백 수천명(조금 부풀려진 것이겠지만)의 파병 인원들 중에서 살아 돌아온 세 사람 중에 끼어있었다는 것과, 함께 왔던 나머지 두 사람은 전쟁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을 전전하며 불행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오한증도 당시 살포되었던 고엽제로 인해 생긴 병이라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러한 믿기 힘든 이야기는 치기어린 아이들의 입에서도 나왔기에 전부를 신뢰할 수는 없었지만, 간혹 베트남전 당시의 증언을 취재하기 위해 찾아오는 기자들을 보면 새파란 거짓은 아니었던 듯 하다.


그런데 몇해전 국사 선생님이 운명을 달리하셨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수 년동안 병마와 싸우다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년 동안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면서도 생기지 않았던 상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던 것이다. 왜 수업시간에 우리에게 자신의 무용담을 들려주지 않았던 것일까? 남자들은 보통 안주삼아 군대이야기를 즐겨하고, ‘내가 군대에 있을 때’같은 상투적인 말로 허풍을 부리곤 하는데 누구보다도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을 선생님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일까. 예전에 <실미도>를 보았을 때는 선생님도 저렇게 일급비밀에 속하는 특수 임무를 맡고 있던 부대여서 그런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선생님에게서 풍겨져온 느낌은 영화 속 실미도 부대원들에게서 느껴지는 증오와 원망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한 여름에도 오한에 몸서리치고, 함께 살아 돌아온 전우가 정신병원에서 병들어갈 때 자신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간 과거 은사님에 대한 기억은 <알포인트>를 보며 되살아났다. 이 영화에 대한 것들은 베트남전 당시 캄보디아 접경 지역의 ‘로미오 포인트’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영화화 한다는 소식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더욱이 흑백영화 시절 영화 속에 자주 등장했던 베트남전을 소재로 했으면서도 공포와의 교접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관심이 기울었던 것이 사실이다. 아직 국내에서 제대로 시도된 적이 없는 전쟁공포라는 장르는 분명 지금까지 먹어보지 못한 색다른 맛을 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으니까.


뚜껑을 열어본 <알포인트>는 기대를 충족시켜주면서 내 기억속의 의문을 조금이나마 해소해주기에 충분했다. 영화는 돌아올 수 없는(不歸)의 땅에 들어선 9명의 병사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알포인트’에서 전멸한 줄로만 알았던 부대원의 구출 요청 무전으로 인해 그들을 구해내라는 명령을 하달받고 투입된 대원들. 그들은 전역을 얼마 안 남긴 채 소 한 마리값을 모아갈 생각에 부풀어 있으며 미제 라디오 하나를 사서 돌아가겠다는 소박한 꿈을 가진 청년들이다. 이렇듯 배고픔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전쟁터로 향했던 우리의 아버지요, 형, 오빠였던 것이었다. 그러한 그들이 자원해서 들어간 곳은 인적은 티끌만큼도 느낄 수 없는 불귀의 땅이라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최태인 대위-감우성]이하 8명은 한때 프랑스 군의 휴양지로 쓰이다 주둔했던 프랑스군이 전멸하고, 그 곳을 거쳐갔던 수많은 군인들이 사라져간 안개 속 폐건물을 베이스 캠프삼아 수색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대낮에도 음산한 분위기가 맴도는 그곳에서 7일간의 작전을 수행하던 대원들은 어느새 하나 둘씩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이 작품에서 건져 낼 수 있는 것은 꽤나 많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새로운 시도로 장르의 다변화를 꾀했고 그 결과 역시 만족스러운 정도라는 것을 우선 꼽을 수 있겠다. 처녀귀신이 득세하던 80~90년대를 지나고, 일본발(發) 공포영화의 영향을 받아 땅바닥을 스물스물 기어오며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정체불명의 원혼들도 지나 이제 공포 영화는 ‘거기서 거기’라는 인식이 생길법한 때 등장한 <알포인트>는 분명 단비와도 같다. 또한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는 수십년 전 괴담을 바탕으로 해 생길 수 있는 괴리감을 메워준다. 유약해 보이는 이미지가 강했던 [감우성]는 이 영화를 통해 강인하면서도 뭔가를 감추고 있는 듯한 [최대위]를 성공적으로 연기해 냄으로써 극의 무게중심을 잡는 동시에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있다. 그를 받쳐주는 조연 배우들 역시 훌륭하다. 선임하사인 [진 중사]를 연기한 [손병호]는 예의 날선 눈빛과 힘있는 발성으로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있다. 덧붙여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부대원을 연기한 나머지 배우들 역시 영화와 연극을 오가는 연기파로 인정받아온 바 그 명성을 재확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 한가지 미덕은 이국적인 공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유일하게 승리하지 못한 전쟁인 베트남전, 그리고 그들을 끝까지 괴롭혔던 베트콩의 게릴라전은 정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빽빽이 늘어서 있는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정글은 엄폐물이 되는 동시에 언제든 뛰쳐나갈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알포인트>는 이런 정글과 갈대밭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정글 사이를 뛰어다니는 정체불명의 무언가와 수색 중 갈대 사이로 불현듯 사라지는 병사의 뒷모습은 긴장감을 배가 시키면서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한마디로 빤히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제대로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을 정글이라는 공간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폐건물은 어떤가. 완전히 타버려 콘크리트자체의 질감밖에 드러내고 있지 않은 그곳에서 공포는 배가 된다. 벽과 천정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곳 역시 정글과 닮아 있다. 병사들은 한 공간에 몰려 있기에 서로에게서 위안과 용기를 얻는 동시에 공포를 스스로 증폭시킨다. 더욱이 그 공간이 끔찍한 과거를 담고 있는 그릇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병사들은 서로를 불신하고 서로에게 총부리를 들이미는 참혹한 전쟁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암전하는 등(燈)에 의해 더욱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폐건물 안에서 펼쳐내고 있으니 공포는 시너지효과를 낼 수밖에.


그렇다면 <알포인트>를 통해서 본 내 기억에 대한 의문은 어떻게 된 것일까. 일단 은사님이 무용담에 대한 묵묵무답에 감춰진 속내는 영화 속 [최 대위]를 비롯한 9명의 병사들과 비슷한 점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병사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고향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 품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참전 용사로 금의환향은 아니더라도 소박한 꿈을 간직한 채 돌아갈 날만 품고 있던 그들이 말미에 선택한 ‘알포인트 작전’은 더 나은 모습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바램에서 나온 것이었으니까.


반면 병사들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베트남 사람들의 원한이었다. 이념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폐허가 되어가는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스러져간 베트콩들의 원혼이 그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손에 피를 묻힌자 돌아가지 못하리라’라는 비석의 글귀는 그들의 증오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렇듯 적대 관계에 있던 양측 모두 전쟁의 원인이었던 이념의 분쟁은 잊어버리고 살기위해 죽이고, 죽지 않기 위해 다시 일어나 방아쇠를 당기는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한바탕의 포성 뒤에 정신을 차리고 손에 묻어 있는 피와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시체를 보고 난 뒤 후회한다해도 이미 늦은 것, 이런 악순환은 되풀이 되는 것이다. 고국과 멀리 떨어진 타지에서 생사의 경계를 경험하는 그들에게 이성의 존재를 묻는 것은 욕심이 아닐까. 아마도 국사 선생님이 밝히지 못했던 무용담은 세 명의 생존자 중 끼었다는 자승심보다는 그 땅에서 죽어간 수백 수천의 사람들 속에 끼지 못했다는 미안함 때문은 아니었을까..


두시간 남짓한 러닝타임이 지나고 <알포인트>의 끝 장면에서 폐건물이 안개 속으로 멀어져갈 때 관객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바짝 당겨져 있던 긴장의 끈이 일순 느슨해지며 안전한 땅을 밟고 있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나 역시 마지막에 드러나는 작전 수행지역 ‘알포인트’의 비밀과 병사들의 결말에 일말의 배신감(영화의 완성도에 대한 것은 아님)과 안도감을 함께 느끼며 자리를 떴다. 개인적으로 영화 외적인 기억과 결부되어 영화를 보는 내내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모처럼만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공포’ 영화임에 이견은 없었다.


<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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