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한 복수인가?
보디가드에 대한 직업적 필요성이 대두되고 나면 이미 도덕이나 윤리는 뜬구름이 되어버리는 세상이 아니던가.
돈으로 지키는 사람의 목숨이 진짜 의미가 있을까. 이미 이 영화의 배경은 윤리와 도덕 없이 돈으로 점철된 아노미 사회에서 시작됐다.
그런 속에서 인간적인 유대와 감동을 투영하는 것이 어쩌면 더 고리타분하고 무의미할지도 모르지만 다코다 패닝(피타 역)의 연기는 감동 그 이상이다.
아역 배우 하나가 주인공에게 주는 의미만으로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복수가 용서를 받는지도 모른다. 어쨋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인간을 미치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될 테니.
이 영화에서 덴젤 워싱턴(크리시 역)은 건조하기에 매력이 있다. 건조함의 매력은 불이 붙으면 무섭게 타버려 자신까지도 버릴 수 있음이 아니던가.
아이의 동심과 순수성에 매료되어 본연에 감추어진 선함이 드러났다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그도 비 도덕 사회의 비 도덕적 인간일 뿐이다.
악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정의의 기사였다고 표현한다면 그 일은 유괴의 절망감이 자신의 일이 되기 전에 해결했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었을까.
헐리우드 영화의 내용에 의미를 두지 않아야 하는 일차적인 의무감에 벗어나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얘기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 하다만
어쨋거나 유혈낭자한 피 속에 하얀 장미처럼 선명하게 대비되는 연기들은 그나마 빛을 잃지 않는다.
그 덕에 순수와 타락 사이의 순화를 보여주는 피타와 크리시의 드라마는 눈물샘을 건들일지도 모른다.
어쨋건 아이가 등장하는 영화는 인간 내면의 뭔가를 건들이는 묘한 힘이 있는 것은 사실이니…
이나마 무엇을 위한 복수였는지 대충 얼버무릴 이유는 생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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