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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후로도 오랫동안... 비포 선셋
beatle9 2004-10-28 오후 5:50:24 1735   [12]
 

아름다운 비엔나의 풍광, 예술가적 흥취를 물씬 풍기던 거리의 시인 걸객, 점성술가 등을 만나며 유럽의 낭만을 담뿍 담아와 세계 젊은이들의 유럽여행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비포선라이즈가 9년만에 그 뒷 이야기를 들고 우리를 다시 찾아왔다.

 

비포선라이즈. 제시와 셀린은 부다페스트 발 파리행 열차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을 나눈다.그 다음날 아침 첫 열차 시간, 마치 정말 영화와도 같이 아니면 젊은 시절이라서 가능할 열정처럼 6개월 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아쉬움을 가슴 가득 담고 헤어진다. 이십대 초반의 젊은 남녀가 쉽게 사랑에 빠지듯 아름다운 낭만을 담아 이야기를 펼치지만 그저 그런 또래 젊은이들과 달리 속내깊은 많은 대화를 나눈 그들은 불투명한 미래에 자신의 사랑도 함께 쓸어 담아 버렸다. 다시 만날 때 우리는 더 사랑할 자신이 있었다는 듯.

 

6개월 후 그 날,

미국에서 아버지에게 구걸하듯 돈을 얻어 셀린을 만나러 유럽으로 날아온 제시와 달리 할머니의 부음으로 장례식에 참석해야 했던 셀린. 결국 둘은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9년

 

9년간의 세월의 흔적을 외모에 고스란히 담아 젊음의 생기는 이제 사라진 모습으로 그렇게 둘은 파리에서 다시 만났다. 우연을 빙자한 필연으로 늘 사랑은 다가온다. 입증되지 않은 화학반응처럼 사랑은 모든 걸 송두리째 엎어버리고 뒤섞어 놓고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다. 멀쩡한 사랑이 있을까. 이성적으로 사랑한다는 게 세상에 존재하기나 할까. 비엔나의 낭만을 가득 담았던 전편과 달리 에펠탑을 거세하여 일상적인 파리의 풍경을 배경으로 한 감독의 의도가 모든 것을 말해주듯, 다른 점이라면 너무나 솔직하고 더 편해진 두사람의 모습과 대화이다.

 

전편에서 청초한 대학생으로서 꿈과 이상으로 가득차고 모든게 낙관적이었던 셀린이 이제는 온갖 세상의 악덕과 싸워야 하는 환경단체에서 일하면서 세월에 무뎌진 억척스런 커리어우먼이 되어 있었고, 약간 삐딱했지만 세상을 담을 만큼 이상이 컸던 제시는 이제 세상 무엇을 줘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네살배기 아들과, 사랑의 교감을 나눌 수 없는 아내가 있는 무기력한 일상의 평범한 소설가 가장이 되어있다.

 

둘은 서로의 사랑의 무게를 견주기라도 하듯 티격태격 말싸움을 하기도 하고 그윽한 눈빛처럼 바라보기도 하다가 자신의 이상을 뜨겁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전편에서는 막 사랑을 시작한 사람들의 뜨거움을 대변하듯 영화내내 서로 입맞춤과 스킨쉽을 나누던 제시와 셀린. 선셋에서는 단 한번씩 길을 오갈 때 손을 잡아주고 헤어지기 직전 가벼운 포옹을 나눌 뿐이다. 하지만 이젠 그보다 더 깊고 평온한 사랑의 훈기가 그둘을 더욱 굳세게 맺어주고 있었다.

 

솔직한 대화와 세세한 감정의 떨림조차 모두 담아낸 장면들로서 둘의 재회를 함께 가슴떨려하며 리얼타임으로 지켜 보아주는 관객들에 대해 감사의 표현으로서 링클레이터 감독은 모든 것을 내보여주었다. 그리고 9년전 그때 희망이 많아서,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어서 더 뜨거웠던 그 사랑이 이제는 전개되면 불륜이 되어버릴 지도 모를 슬픈 상황이 된 현실의 무게와 아련함이 영화 여기 저기서 묻어난다.

 

차 안에서 그간의 그리웠던, 사랑했던 심정을 격하게 토해내는 둘의 대화.

셀린의 집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면서 너무나 그리웠다는 듯이 제시의 옆 모습을 흘깃거리는 셀린의 모습.

특히나 셀린의 노래를 들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지며 옅은 미소를 짓는 제시의 모습은 비포선셋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장면이었고 내게 너무 슬픈 그대였다. 사랑에 대한 모든 선택이 열려있었던 전편과 달리 이젠 사랑할 수 없게 되어버린 둘의 처지가 못내 슬프고 아쉽다. 다시 그날로 되돌아 간다면 널 그렇게 보내지는 않았을텐데. 6개월 후 우리가 만났더라면 우리가 지금 이리 슬프지는 않을텐데.

 

꿈을 꾸면 그 꿈 속에 늘 네가 내 옆에 있어. 그래서 울다 일어나면 내 옆에는 네가 사라지고 없어서 마음이 아프다는 제시의 고백에, 네가 그 날밤 나의 모든 것을 다 가져가버린 것 같아. 그 날, 내 모든 것을 태워버려서 내겐 남은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는 셀린의 토로.

 

그들은 단지 그 하루의 밤에 사랑을 나눈게 아니라 그 후 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픔이 없다면 추억은 참으로 아름다울텐데라던 제시의 말에 프랑스의 어느 평론가가 했다던 말이 떠올랐다. "망각 없이 행복은 있을 수 없다" 때로는 잊혀져야 행복할 때가 있다. 하지만 잊지 않음으로써 더없이 행복한 기억도 있다.

 

9년전 비포선라이즈을 보고 난 후 극장 문을 나설 때, 모두 한가지의 궁금증을 가슴에 품었었다. 제시와 셀린이 6개월 후 다시 만났을까. 나라면 약속장소에 나갈 수 있을까.

 

 

마지막 장면,

 

니나 시몬의 노래를 흥얼거리던 셀린이 제시에게 웃으면서 말을 건넨다. 자기, 이러다가 비행기 시간 놓칠지도 몰라. 젖은 눈망울의 슬픈 미소로 보내는 제시의 답, I know. 그 뒤의 말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화면은 정지한다.

 

90분여 남짓 동안의 리얼타임 사랑이야기 비포선셋의 즐겁고도 가슴아린 여행을 즐기던 관객들은 이런 갑작스런 암전에 잠시 술렁거리며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줄리델피의 노랫소리가 엔딩크레딧과 함께 화면을 가득 채울 때 모두에게 비포선라이즈의 그것처럼 다시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었을 것이다.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 5분후 그들의 모습은? 1시간 후 그들은? 제시는 남았을까? 계속 사랑하기로 했을까. 이별을 택했을까…’

 

하지만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으련다. 어떤 사랑의 모습에도 속편은 있을지언정 사랑의 완성, 결정판은 존재할 수 없으므로. 둘이 그 순간 사랑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므로 더 이상 무엇이 중요할까. 어떤 결정을 하였더라도 그간 나누었던 교감과 사랑은 사라지지 않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 아름다운 두 연인의 뜨거운 심장 속에 여전히 살아 숨쉴 테므로. 그리고 내 마음속에도 나의 사랑을 정의 내려준 감사함으로 간직될 것이므로.

 

내사랑 그대. 진정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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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선셋(2004, Before Sunset)
제작사 : Castle Rock Entertainment / 배급사 : 에무필름즈
수입사 : 에무필름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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