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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마저 동화로 만드는 사랑의 힘 인게이지먼트
jimmani 2005-03-10 오후 8:20:45 1269   [10]


사실 내가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을 좋아하게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의 이전 작품들이 상당히 이상한 스타일로 특이했기 때문이다. <델리카트슨 사람들>이나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는, 사실 내가 어느 정도 기괴한 스타일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너무 어둡고 비주류적인 색채가 강해서 그런지,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아멜리에>를 보고 난 뒤부터는 생각이 싹 바뀌었다. 그만의 그러한 괴이한 스타일을 어두운 쪽이 아닌 밝은 쪽으로 선회를 하니 알고보니 내가 딱 좋아할 만한 스타일이었다는 거다. 적당히 괴상하고 특이한 상상력이 있으면서도 그 기본에 따뜻한 인간미가 어느 정도 깔려 있는... 마음을 정화시키는 듯 강렬하면서도 따뜻한 색채도 인상적이었고. 그래서 어느새부턴가 나는 장 피에르 주네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되었고, 이 영화 <인게이지먼트>가 후속작이라는 소식을 듣고 난 뒤부터 급속히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주네와 오드리 토투가 또 한번 만나 만들어낸 이 동화같은 전쟁 로망 <인게이지먼트>. 주네 감독이 왜 또 오드리 토투를 출연시켰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오랫동안 파트너로 활동해 온 마틴 스콜세지와 로버트 드 니로의 경우를 들며 반문했던 것처럼, 이 영화는 또 한번 둘이 떼놓을 수 없는 찰떡 콤비임을 또 다시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고리타분한 보통 전쟁 로망이 아닌, 마음 속에 분명히 각인될 만한 강렬한 스타일의 영화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한가운데, 다섯명의 사형수 병사가 극한의 비무장지대로 파견됐다. 거기 파견돼서 적군에게 발각돼 죽는 식으로 사형을 시키는 것이다. 이 다섯 명의 병사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이유로 어쩌다보니 자해 죄를 뒤집어쓰게 됐는데, 이 중에는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새파란 청년 마네끄(가스파 울리엘)가 있다. 그리고 그에게는 일생동안 사랑해온 소중한 약혼녀 마띨드(오드리 토투)가 있다. 단 한시도 마네끄를 잊지 못하는 마띨드는 그가 살아오기만을 삶의 일분 일초 내내 빌고 있다. 일곱을 셀 때까지 기차 검표원이 들어오지 않으면 그는 죽은거야, 사과껍질이 끊어지지 않으면 그는 살아 있는 거야, 이런 식으로 그녀는 삶의 모든 부분을 마네끄의 생사 여부와 연결시켰다. 마네끄를 너무나 만나고 싶어하는 마띨드는 결국 그를 직접 찾아나서기에 이른다. 그가 함께 있었다는 나머지 병사들을 포함한 관련 인물들을 만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그 과정에서 마띨드는 점차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비밀들을 알게 되지만, 그 와중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데...
 
<아멜리에>를 통해 너무도 뚜렷하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 오드리 토투는 이 영화에서 그 이상의 연기를 보여주며 더욱 성숙한 여배우로서의 면모를 과시하지 않았나 싶다. 그녀가 연기한 마띨드는 <아멜리에>의 주인공 아멜리처럼 즉각적 감정에 잘 반응하는 통통 튀는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마치 수많은 세월의 풍파를 겪은 듯 수심이 잔뜩 들어 있었고, 표정 하나하나도 통통 튀는 가벼운 이미지에서 벗어나, 진지한 고민이 있는 보다 무게있는 표정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나온 오드리 토투의 영화들만 해도 마케팅하는 쪽에서 기존의 <아멜리에> 이미지를 여러번 울궈먹은 점이 없지 않았지만(심지어 전혀 상관없는 영화가 단지 오드리 토투가 나왔다는 이유로 <아멜리에 2>라는 제목으로 나오기도 했다), 이 영화를 통해 분명 그녀는 연기의 스펙트럼을 한단계 넓힌 것이 분명하다. 그녀가 <다 빈치 코드>의 여주인공 소피 느뵈 역을 맡았다는 걸 알았을 때 조금 걱정되기도 했지만, 이 영화 속의 그녀의 모습을 본 이상, 이제는 걱정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오드리 토투 말고 또 한 명의 눈길을 끄는 배우가 있는데 그가 바로 조디 포스터다. 내가 본 극장 내에서도 그녀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렸을 만큼, 그녀의 이 영화 출연은 상당히 놀라웠다. 그것도 미국인 역할도 아니고, 프랑스어 연기를 완벽에 가깝게 소화해내며 사건의 실마리 중 하나를 쥐고 있는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다. 어디까지나 평범하고 억척스런 보통 아내였지만, 전쟁을 앞두고 새로운 사랑에 눈뜨게 되면서 마음의 변화를 겪게 되는 그녀의 모습은, 짧았지만 여느 주연 못지 않게 강렬했다.
 
이외에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인물들은 물론 있다. 자칫 무겁게 가라앉을 수 있는 극의 분위기를 고려해서인지 웃음을 주는 인물들도 적지 않은데, 마띨드를 키워 온 친척 부부의 다소 주책스러운 면, 폼에 목숨 건 우체부, 자신을 명탐정이라고 일컫길 주저하지 않지만 가끔 엉뚱한 구석도 보이는 탐정 자멩 피어 등 감초 캐릭터들이 웃음 또한 선사한다.
 
영화는 크게 두 가지 톤으로 전개된다. 전쟁과 같은 참혹한 상황이 당장에 없는 생활 속 모습과, 전쟁 상황이 한참 진행중인 전쟁터의 모습이 그것이다. 전쟁과 상관없이 일상이 흘러가는 생활 속 모습은 전체적으로 갈색 톤으로써 참 낭만적인 인상을 풍긴다. 마치 6~70년대 클래식 영화를 보는 듯, 그 속의 풍경은 아련하고 향수가 짙게 배인다. 주인공들의 사랑을 더욱 로맨틱하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그러나 또 다른 부분을 차지하는 전쟁 장면은 정반대다. 일관되게 보여지는 회색 톤의 전투 신 혹은 참호 신은 건조하고 차갑기 이를 데 없다. 중간중간에 적잖이 나오는 총격 신, 폭발 신의 잔혹한 장면들 또한 여느 전쟁 영화 못지 않게 리얼한 면이 있다. 아마도 전혀 상반된 이 두 톤의 화면을 전개시킴으로써, 삶과 사랑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한편, 전쟁의 섬뜩한 면도 강조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싶다.
 
영화는 이렇게 전쟁 영화와 로맨스 영화 두 측면 뿐 아니라 추리 영화로서의 면모도 보인다. 영화 내내 마띨드는 마네끄의 생존과 관련되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사람들이 말하는 전쟁 속의 비밀들이 하나둘 벗겨지면서 그녀의 예상이 하나둘씩 빗나가기 시작한다. 그들의 기억이 하나둘 꺼내지면서, 전쟁 속의 진실을 하나 둘 퍼즐이 짜맞춰지듯 재배열되고 마지막 결말에 다다르면서 정말 있었던 일에 가장 가까운 진실들이 밝혀지는 것이다. 결말의 반전이라든가 하는 요소는 없지만,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앞서 말한 조디 포스터도 포함된다)의 이야기를 들어가면서 과거를 재배열해나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 영화의 주인공 마띨드는 사실 어찌보면 무모할 정도로 마네끄를 기다린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죽었다고 생각하고, 조사를 끊임없이 해도 그의 죽음 쪽으로 사건의 경과가 기울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너무도 끔찍한 광경을 많이 봐야 하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의 이런 굳은 기다림은 집착처럼 보여 소름끼치기는커녕, 오히려 더 아름답게 보인다.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대규모의 살상행위인 전쟁 속에서도 전혀 아랑곳 없는 그녀의 기다림은 살상의 악순환과 절망 밖에 남지 않은 세상 속에 한줄기 희망을 던져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을 넘어서, 삶에 대한 절박한 집념으로도 느껴지게 한다.
 
전쟁을 소재로 한 만큼, 이 영화도 이렇게 삶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영화 속 전쟁 장면은 앞서서도 말했지만 정말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눈앞에서 폭탄이 터지면서 전우의 온갖 장기들이 산산조각나 몸에 튀기도 하고, 전우의 시체를 방패삼아 총알을 피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나 이렇게 전쟁의 마수가 온통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도, 사랑에 대한 기다림, 삶에 대한 애정 앞에서 그 힘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전장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은 서로에 대한 기다림이 영화 속에서도 한편의 완벽하게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를 만들었고, 서로의 사랑이 봉오리 상태에서 더욱 만개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니.
 
<아멜리에>를 통해 풋사랑에 대한 달콤한 추억을 되새겨주었던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은, 이 영화 <인게이지먼트>를 통해, 풋사랑을 넘어 한껏 익은 사랑의 숭고함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상대방이 나를 아직 사랑하고 있든 하지 않든, 단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가 살아있기만을 바라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이미 사랑을 충분히 성숙하게 이룬 결과이며, 나아가 삶에 대한 애정을 맘껏 펼쳐보이는 행동이라고 강조하고 있지 않나 싶다. 그 참혹한 전쟁조차도 한낱 추억처럼, 동화처럼 쇠약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 바로 사랑의 힘, 삶의 힘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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