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이라는 입지 조건으로 자연스럽게 외부와는 단절된 공간. 오가는 대화와 굿판으로 보아 뭔가 숨은 사연이 있을 법한 이곳에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일어납니다. 그 일로 육지에서 관할 관리들이 섬으로 들어오지만 그들 앞에는 꼬챙이에 꽂힌 한 구의 시체가 더 추가되죠. 그리고 이 시체를 시작으로 또 다른 살인이 일어나게 됩니다. 영화 <혈의 누>의 초반부에요. 넘쳐나는 게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영화라지만 사실 우리 영화들 중 살인 사건을 본격적 소재로 한 영화는 1년에 몇 편 나오지 않습니다. 잘 만들어야 본전이고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관객들로부터 욕만 바가지로 먹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우리 영화답지 않게 연쇄 살인을 주요 소재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궁금했죠. '과연 감독이 자신 있었던 걸까? CSI 같은 외화 시리즈로 고급 사양이 된 관객들의 눈을 제대로 만족시킬 수 있을까?'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감독의 이름이 스크린에 찍히면서 어쩐지 이 영화가 단순 스릴러로 머물지는 않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도대체 감독의 전작인 <번지점프를 하다>와 미스터리 스릴러를 어떻게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요? 아니나 다를까, 영화는 그저 흥밋거리로만 도배가 된 미스터리물로 남길 거부합니다. <혈의 누>에는 사람들의 여러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두 얼굴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죄를 감당해내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들이 있으며, 그 나약함을 집단이란 촉매를 거쳐 광기로 거듭나게 하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이기심과 공명심으로 인해 죄의 업보를 짊어진 사람들이 등장하며, 그 업보 속에서 허우적대다 결국에는 비극을 낳는 사람들을 스크린에 담아냅니다. 그리고 업보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짊어진 사람들이 대면하게 되는 악연이 나오구요. 이런 점들이 헐리웃에서 만들어진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와 다른 점입니다.
그런데 이 차별점이 영화의 미스터리란 요소엔 악재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우연이란 현상은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의 가장 큰 적이고, 상징적이고 모호한 표현들 역시 명쾌함을 요구하는 미스터리 장르에 있어서 독약이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혈의 누>에선 인연은 우연이란 모습으로 선보이기도 하고, 사람들의 죄의식과 나약함 등을 보여주기 위해 무속 신앙에서나 믿을 법한 이상 현상을 등장시키기도 합니다. 만약 관객들이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스릴러를 원했다면 이 점은 분명 그들의 기대치를 깎아내리는 요인이 될 겁니다.
<혈의 누>는 단순히 재미만을 전달하기 위한 영화라곤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살인 사건의 발생과 그 해결이 가장 큰 틀이긴 하지만 그 원인이 밝혀지고 상황이 확대되어 가면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모습도 감독은 나름 신경 썼을 것으로 생각되거든요. 개인적으론 양쪽 모두 쳐짐이 없이 균형이 잘 잡힌 영화인 듯싶군요. 하지만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미스터리물의 가장 큰 걸림돌은 자신들을 합리적이라 믿고 있는 관객들의 스스로에 대한 편견입니다(그 관객에는 저 자신도 포함되죠). 부디 <혈의 누>는 그 편견을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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