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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허구의 퍼즐게임, 기분좋게 속았어 스파이더
vinappa 2005-05-08 오전 1:03:41 1802   [7]
    거미는 몸 속에서 반투명의 실을 뽑아 낸다. 사람들은 그것을 일반적으로 거미줄이라고 부른다. 거미는 거미줄을 두 가지의 용도로 사용한다. 그 하나는 방어의 수단으로 거미줄을 얽어서 만든 거미집의 중앙에 알을 낳아서 적들의 침입으로부터 알들을 보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격의 수단으로 먹이감을 사냥하기 위한 덫으로 활용한다. 기괴한 신체 변조의 대가 크로넨버그가 정상적인 인간의 신체를 보존하고 대신에 의식과 무의식의 역할론에 의문을 제기한 2002년 연출작 <스파이더> 역시 제목이 은유하는 것처럼 거미줄이라는 소재를 두 가지의 용도로 활용한다. 그 하나는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기억 조작용이고, 다른 하나는 살인의 수단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데니스 클레그(랄프 파인즈)는 화면에 처음 등장하는 순간부터 정상적인 인격이 아님을 드러낸다. 주시하지 못하고 흘깃거리는 눈빛과 불안과 혼돈, 강박증으로 흔들리는 표정, 겹겹이 껴 입은 추레한 상의 속의 깡마르고 구부정한 어깨. 사방으로 뻗친 그의 머리칼은 그 자체만으로도 카오스적이고 과거에 그가 겪었음직한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직감하게 한다. 감독 크로넨버그는 데니스 클레그 또는 스파이더의 머리 스타일을 일컬어 요동하는 아비규환이라고 표현했다. 인간이라기보다는 망령에 가까운 데니스 클레그(이하 스파이더)는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정신병원을 나와 페기 스트리트에 위치한 사회 복귀 시설을 방문하고 그곳의 지배자인 폭군 여왕 윌킨슨 부인(린 레드그레이브)을 만나게 된다.

    질서 정연하고 유사한 외관의 건물들이 늘어선 페기 스트리트는 스파이더가 유년을 보낸 도심 외곽의 한적한 동네다. 반복되는 형태와 색조를 가진 이 거리는 운하를 끼고 있으며 스파이더의 현재를 지배하는 유년의 트라우마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스파이더는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집과 아버지의 텃밭, '도그 앤 베가'라는 이름의 펍과 '솔즈베리 호텔'의 바를 드나들며 유년의 기억들과 조우한다. 폭군이었던 호색한 아버지 빌(가브리엘 번)과 내성적이고 정숙한 어머니(미란다 리차드슨), 호색한인 아버지와 통정하고 어머니를 죽게 한 추악한 매춘부 이본느(미란다 리차드슨) 사이의 얽히고 섥힌 이야기들이 무질서하게 전개되며 스파이더의 정신병이 폭력적인 아버지와 매춘부 이본느의 농간에 의한 것인 것처럼 이야기를 끌고 가지만 진실은 의외의 곳에서 불거진다.

    씨네 21의 프리뷰에서 정 한석 기자는 이 영화의 핵심을 데칼코마니 기법이 가진 이중의 무질서의 매력이라고 했다. 기자의 지적처럼 영화 도입부에 의미심장하게 나열되는 좌우 대칭의 모호한 상징들과 거울에 비친 반사상이 가진 암시, 유사 기억과 현실이 병렬로 전개되는 이야기 구조 등 어느모로 보나 이 영화는 스토리 전개의 추진력을 대부분 데칼코마니 기법에서 얻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데칼코마니 기법이 가진 무질서함의 영화적 실험으로만 단정짓게 된다면 중요한 몇가지를 놓치게 되지 않을까 싶다. 현대 회화의 한 기법인 데칼코마니는 먼저 만들어진 반쪽 면과 남은 반쪽 면이 만나서 예상치 못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기법이다. 어느 쪽이 먼저이고 어느 쪽이 나중인지 구분하기 어렵고, 애초에 결과물을 예상할 수 없다는 점에서 회화적 매력이 평가되지만 그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물만 놓고 보면 또 얘기가 달라진다. 회화 기법에 관한 전제가 없는 상태에서 결과물을 보게 되면 그것은 사방으로 산만하게 뻗쳐진 방사형의 추상화가 된다. 때때로 의도한 듯한 정형적인 이미지를 갖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비정형적이고 피상적이다. 이 영화가 꼭 그렇다. 현실과 환상, 기억과 추측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 이 영화는 진실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펼쳐진 거미집과 같다. 스파이더의 현재가 과거의 영향 아래 있고, 반대로 그의 과거가 현재의 혼돈 속에서 재구성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현실과 비현실의 대칭구조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현실을 모티브로 거미집을 만들어 진실을 은폐하고 다시 기억의 거미줄을 타고 들어가 거미집을 해체하고 진실을 파헤치는 영화다.

    감독 크로넨버그는 영화 전반에 걸쳐 대칭성을 구축하고 있지만 대칭된 것들의 좌우 경계선에 버텨 선 스파이더는 오히려 거미집을 만들듯 사방으로 혼돈의 거미줄을 친다. 스파이더는 사회 복귀 시설의 지배자인 윌킨슨 부인의 이름을 단서로 매춘부 이본느 윌킨슨에 대한 기억을 떠 올리고 자신의 어머니인 클레그 부인과 대치점에 위치시킨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어쩌면 이본느 윌킨슨은 스파이더의 분열된 의식이 가공해 낸 허구의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클레그 부인과 이본느의 일인 이역을 담당하고 후반부에는 윌킨슨 부인까지 연기한 미란다 리차드슨은 감독이 제시한 가장 중요한 단서다. 스파이더의 기억의 출발이 윌킨슨 부인과 만나는 시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유사 기억 속에서 돌아 온 스파이더가 그만의 문자로 휘갈겨 대는 낡은 노트는 기억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서 꾸며지는 허구임에 분명하다. 감독은 관객으로 하여금 스파이더가 휘갈겨 대는 의미없는 철자들을 기억의 카오스에서 끄집어 낸 중요한 단서로 확신하게 한 후 후반부에 이르러 그 낡은 노트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스파이더에게 노트를 찢게 하고 유년기와 같은 범죄를 시도하게 한다. 범죄를 시도하려는 순간 일어난 스파이더의 각성으로 인해 사방으로 뒤엉켰던 거미집이 해체되고 거미알집이 발견되면서 이 영화의 진실이 드러난다.

    어린 스파이더의 목격담이라고 할 수 없는 부분인 아버지의 외도는 폭력적이고 다혈질인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펍에서 만난 매춘부에 대한 혐오가 어린 스파이더의 상상력을 부추겨서 만들어 낸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이 날조된 허구를 진실로 믿게 만드는 것은 핵가족을 향한 관객의 패러다임인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다. 폭력적이고 불충실한 아버지, 정숙하고 내성적인 어머니, 숫기 없고 말 잘 듣는 아들만 나오면 여지없이 적용되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어머니와 아들의 유대를 견고하게 하고 상대적으로 아버지의 파렴치함을 과잉 해석하게 한다. 감독은 관객들의 고정관념의 허를 파고 들어 공간을 만들고 어린 스파이더의 여성 혐오와 여성인 어머니의 성적 뉘앙스를 교배시켜 이본느라는 허구의 인물을 탄생시킨 것이다. 어린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서 보낸 스파이더가 아버지와 이본느의 관계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자체가 그것이 기억이 아닌 가공의 것임을 더더욱 확신하게 한다.

    어쩌면 스파이더가 사회 복귀 시설의 맞은 편에 위치한 가스 탱크의 가공할만한 위용 앞에서 자신의 범죄 사실을 기억해 내기 이전의 기억들은 모두 허구일 수도 있다. 현실과 비현실의 틈새를 비집고 간간히 등장하는 베케트 풍의 환상은 이런 혐의를 더 짙게 만든다. 구태여 베케트라는 이름을 떠올리지 않아도 영화 속 몇 장면을 뜯어보게 되면 기억의 허구성은 쉽게 읽어낼 수 있다. 스파이더가 집요하게 매달리던 퍼즐 맞추기를 한번에 뒤엎어 버리는 장면이라던지 정신 요양원 시절 스파이더가 숨긴 유리 파편 한 조각이 가진 의미를 되새겨 본다면 스파이더의 과거 회상이 가진 허구성은 명백해지리라 생각 된다. 스파이더는 환상임이 분명한 상황에서도 매춘부 이본느의 이미지를 떠 올리고, 현실 속에서도 이본느를 공포의 대상으로 소환한다. 이것은 분명 혼돈이다. 뒤엉킨 실타래같은 스파이더의 무의식 속에서 빚어진 혼돈이 질서 정연한 현실에서도 재현된 것이다. 현실에서 스파이더가 저지를뻔한 두번째의 범죄가 발생 직전에 종료된 것은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충돌 때문이다. 그 충돌의 여파로 스파이더는 과거사의 진실을 각성하게 된다. 애초에 매춘부 이본느는 없었다.

    문학 원전을 가진 이 영화를 기법이라는 형식면에서만 판단하는 것은 엄청난 패착이다. 영화적인 면에서는 화면의 질감, 조명의 배치, 독특한 카메라 구도 등 수려한 미장센들이 넘쳐 나고, 미장센의 연결은 시적 감수성으로 충만하다.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심지어 뼈 속과 골수 까지 혼돈으로 들어 찬 듯한 스파이더를 연기한 랄프 파인즈, 세 사람의 인격을 표현하면서도 불성실한 관찰자를 훌륭하게 조롱했을 법한 미란다 리차드슨, 스파이더의 상상 속의 아버지와 실재의 아버지의 미묘한 간극을 훌륭하게 표현한 가브리엘 번, 눈빛만으로도 가공할만한 위압감을 발산한 린 레드그레이브 등 절세의 연기를 펼친 배우들에게는 존경심까지 우러 나온다. 크로넨버그의 이전 작품들에 열광한 오래된 팬들에게는 다소 아쉬움이 따르기도 하겠지만 이 영화는 과거 크로넨버그의 귀기와 악취미가 사라진 점을 아쉬워 할 필요가 없는 노장의 풍미가 느껴지는 훌륭한 영화다. 아벨 페라라가 <어딕션>을,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찍으면서 전환기를 맞이한 것처럼 이 영화 <스파이더>는 크로넨버그의 전환점임이 분명하다. 만족스럽게 여기고 차기작을 기대해 본다.

2005. 03. 24. 山ZIGI VINAPPA

(총 0명 참여)
공감해주시고,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05-06-25 02:55
와~ 최고네요.. 크로낸버그의 "Spider(2002)"에 대한 여러글을 읽어보았지만.. 이처럼 완벽한 이해를 하신분은 처음보네요..   
2005-06-19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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