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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향수에 묻어버린 노장의 허장성세 몽상가들
vinappa 2005-05-08 오전 1:07:45 2208   [4]
    지미 헨드릭스의 음악을 들으며 에펠탑에서 번지점프를 해 보셨나요? 그보다 더 짜릿하고 근사한 일이 또 있을까요? 에펠탑의 반복되는 구조를 탐미하며 수직으로 낙하하는 절묘한 인트로덕션만으로도 이 영화의 형식미는 가히 압도적이다. 논리와 미학이 결합한 에펠탑의 상징성과 그 도시의 문화적 풍요에 넋을 잃은 한 이방인의 환희를 절묘하게 연결시킨 이 비범한 도입부는 구구한 수사보다 감탄사가 먼저 터져 나올 정도로 세련되고 감각적이다. 노련한 스타일리스트의 작품다운 도입부를 지나 욕망과 이상이 혼재하는 진풍경을 기웃거리다 보면 영화는 어느새 끝이 난다. 시간은 참으로 빨리도 흐른다. 115분이라니, 어느새 115분이 흘렀단 말인가! 바둑 두는 식으로 복기를 해보자. 무엇을 보았던가. 문화가 넘실대는 파리의 거리와 혁명의 현장, 혁명의 붉은 혓바닥이 미치지 못하는 밀폐된 낙원과 그 낙원에서 벌어진 벌거벗은 육체의 향연. 육체는 정치를 도발하고 정치는 육체의 쾌락을 염탐하고. 그러다 보면 끝이다. 혁명은 몽상과 운명적으로 결합하고, 청춘의 한 시기는 끈적거리는 해프닝으로 귀결된다. 베르톨루치는 왜 여기에서 마침표를 찍었을까?

    관객의 시각을 사로잡는 비주얼의 매력 못지 않게 대사의 응집력도 견고하다. 70년대 그의 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몽상가들>의 대사들은 도발적이고 쟁점이 분명하다. 영화 감독이기 이전에 시인이었던 이력을 과시하기라도 하는 듯 인물들이 주고 받는 대화들에는 고도의 상징과 함의가 농축되어 있고, 순응을 거부하는 불순함이 도사린다. 이들이 주고 받는 대화는 당시대의 이슈에 대한 논쟁이 대부분이지만 그 논쟁은 68년에 국한된 구시대적 탁상공론의 답보가 아니라 지난 세기와 이 세기를 관통하는 묵직한 주제의식이 담겨 있다. 영화의 왕국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그곳의 거주민들인 시네필들을 예찬하는 매튜의 나레이션은 한편으로 닭살스럽기도 하지만 영화에 처녀성을 바친다는 설정 자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어디 그 뿐이랴. 예정되지 않은 저녁 식사 테이블에서 테오와 테오의 아버지는 대등한 입장으로 논쟁을 벌이다가 '탄원서는 한 편의 시, 한 편의 시는 탄원서'라는 역설적이면서도 칼날같은 경구를 탄생시킨다. 이 한마디의 대사에는 세대간의 충돌을 협의로 발전시키는 수용력과 능동성이 짙게 녹아 있고, 지식과 행동을 하나로 엮어 내는 68혁명의 또 다른 주제의식이 두루 포진해 있다. 여기서 잠시 진보의 불모지였던 한국의 지난 세기, 대학가에 나붙었던 격문들을 떠 올려 본다. 문학으로서의 완성도를 기준으로 놓고 보았을 때 그 격문들은 선동과 고발의 당위성을 밝히는 시사성 외에 아무런 가치도 없었지만 그 순수함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몽상가들>의 카메라는 여체의 아름다움에 심취하고 은밀한 곳에 까지 시선을 던지지만 결코 음란하지 않다. 세 명의 눈부신 청춘들이 전라로 공간을 장악하고, 서로의 적나라한 육체에 주목하지만 나신은 단지 '다 벗은' 육체들일 뿐 그들에게나 관객에게나 탐닉의 대상이 아니다. 또한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스스로 벗은 것이지 강제적으로 벗겨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폭력성과도 거리가 멀다. 섹스에 대한 묘사도 마찬가지다.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은 밀폐된 공간이지만 그것은 단지 공간이 은유하는 내밀함이고 행위 자체는 은밀한 상상력을 부추기지 않는다. 또한 그들이 섹스를 행하는 이유는 벌칙이라는 명분으로 격의를 해체하고 서로를 결속하기 위한 것이지 행위 자체에 대한 탐닉이 아니다. 어쩌면 하나의 통념일지도 모르겠으나 섹스와 노출과 베르톨루치를 연관지음에 있어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 이하 <파.마.탱> - 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베르톨루치에게 있어 <파.마.탱>은 일종의 부채같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몽상가들>의 노출과 섹스는 <파.마.탱>의 것과 명백하게 대조적이다. <파.마.탱>이 전라의 여체가 발산하는 관능을 통해 대안으로서의 희망을 읽고, 섹스를 정치화한 것과 달리 <몽상가들>은 미학에 근거하여 젊은 육체를 과시하고, 섹스를 소통의 언어로 삼는다. 이것은 시네마테크를 현실 세상과 단절된 하나의 왕국으로 규정한 것과 같은 의미다. <파.마.탱>에서 화면을 누비던 잔느의 나신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보다는 전라라는 상황의 특수성과 화면의 질감에 많은 부분 빚을 졌지만 <몽상가들>의 히로인인 이사벨의 나신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게 그려진다. 캐스팅의 배경에서도 드러나는 바이지만 두 영화가 벌거벗은 육체 또는 섹스와 연관하는 알레고리에는 일정 부분 차별성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현재의 시각으로 상징의 시대를 해부한 <몽상가들>은 장점이 많은 만큼 단점도 많은 영화다. 좋게 보자면 한정도 없이 좋은 영화고, 나쁘게 보자면 애쓴 만큼 추잡해지는 영화이다 보니 그에 대한 찬반양론의 갈림 또한 첨예하고 진지하다. 그가 공들여서 찍은 영화 중 공론의 지지를 받은 영화가 한편인들 있었겠나만 이 영화를 둘러싼 논객들의 대립은 전에 없이 완강하고 드세다. 이 치열한 공방은 사실 반가운 일이다. 87년의 <마지막 황제> 이후 비난 일색으로 치닫던 평단의 평가가 다시 60년대와 70년대의 그를 대하는 입장으로 회귀했다는 것이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문제아적 감독이 아니라 논쟁을 몰고 다니는 살아 있는 이슈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개인적으로는 그의 귀환에 헌사를 바치고 싶다. <몽상가들>로 인해 다시 불이 붙은 논쟁의 대부분은 '예술이냐, 외설이냐?' 식의 곰팡이 핀 이분법이 아니라 이 영화가 지닌 중대한 흠결에 관한 것이다. 그 흠결은 상기의 찬평을 뒤집어야 할 만큼 치명적이다. 이 영화의 흠결을 지적함에 있어 무엇보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바로 감독의 의도다. 그는 왜 과거에 숱하게 기웃거린 68년의 파리로 다시 돌아갔는가. 그것도 혁명이 본격화된 5월 이후가 아닌 혁명의 도화선에 막 불똥이 떨어진 2월에서 5월까지의 혼돈의 파리로 돌아간 것일까? 해답부터 밝히자면 그것은 자기를 합리화하기 위함이다. 영화의 결말이 암시하는 것처럼 베르톨루치는 혁명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적이 없었다. 혁명의 성난 인파가 도시를 집어삼킨 그 해의 5월에 베르톨루치는 <파트너>를 찍기 위해 로마에 머물고 있었다. 자신의 영화 스승 고다르에 대한 오마쥬로 가득 찬 <파트너>의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베르톨루치는 주연 배우 피에르 클레멘티를 매주 파리로 보내 그곳의 소식을 수집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정보의 수집을 위한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베르톨루치에게 있어 혁명은 정보와 상상력이 결합한 간접적 경험이었고 실체가 아닌 허상이었다. 이 시기 베르톨루치가 취한 혁명에 대한 피상적 인식은 그의 영화들이 정치와 주의를 대하는 태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그의 지조 없는 변절과 외부자적 시각의 원인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베르톨루치는 이 영화에서 그에 대해 성토하지 않고 오히려 '혁명이란 개인이 이슈에 이끌려 집단에 휩쓸리는 현상'이라는 모호한 발언으로 자신의 얕음을 얼버무려 버린다.

    따지고 보면 베르톨루치는 자신의 작품들에서 단 한번도 내부자인 적이 없었다. 6~70년대 유럽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에서도 그랬고, 8~90년대의 <마지막 황제>와 <리틀 붓다>에서는 오리엔탈리즘까지 가세한 이중의 함정에 빠지기도 했다. 그의 영화 이력 전체를 놓고 볼 때 혁명 또는 정치에 대한 그의 발언은 도발적이기는 하나 진중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는 모두 안일한 패배주의에 길들여져 있었다. 이 영화 <몽상가들>은 나름대로 패배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엿보이나 내부로 투신하고자 하는 몸짓은 없다. 이 영화가 그려 낸 몽상의 공간은 혁명을 잉태한 자궁도 혁명을 비껴 선 유토피아도 아닌 은신과 외면을 위한 도피처일 뿐이다. 자본의 힘은 참으로 대단하다. 혁명과 개인을 저토록 철저히 차단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의 초기 걸작 대부분이 헐리우드 고전들의 모작 꼴라쥬였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그가 열혈 공산당원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모순적이다. <순응주의자> 이후 대부분의 영화들이 부르주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도 같은 맥락에서 모순적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순응주의자>는 반 부르주아적 영화 만들기를 지향하는 고다르를 향한 반감과 부르주아적 패배주의로 뒤범벅이 된 영화였다. <파.마.탱>은 또한 어떠했으며, <스틸링 뷰티>라고 해서 이 혐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극단적으로 말해 <몽상가들>은 베르톨루치의 자기모순이 정점을 이룬 영화다.

    베르톨루치는 섹스에 대해서도 지독하게 온건하고 보수편향적인 인물이다. 설정은 언제나 파격적이고 전복적이었지만 묘사에 있어서는 단 한번도 보편의 상한선을 뛰어넘은 적이 없었다. 모든 경우에서 베르톨루치는 성에 대한 표현 수위를 극단보다 2퍼센트 부족하게 그려 왔다. 그 부족한 2퍼센트는 그가 정치에 임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순응주의자>에서 마르첼로는 동성애 혐오때문에 파시스트가 되었고,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유사한 성적 부도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정치적 부도덕을 외면한다. <파.마.탱>에서 폴과 잔느는 동물적인 성에 집착했지만 행위의 방식에 있어서는 정상성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례적으로 <파.마.탱>에는 아날섹스가 등장하지만 그 변태성은 쾌락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허탈감과 고통 뿐이었다. 차후에 폴이 잔느에게 동등한 기회를 제공한 것은 스스로의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잔느가 겪은 고통에 대한 보상 또는 자기 징벌에 지나지 않았다. 애초에 베르톨루치는 호모포비아와 카마수트라를 신봉하는 정상애 옹호주의자였던 것이다. 성 표현의 온건함에 있어서는 이 영화 <몽상가들>도 같은 수준이다. 한 침대에서 '발가 벗고 함께 자는' 쌍둥이 남매는 그 침대를 자궁으로 삼은 것이지 욕망의 무대로 삼지 않았다. 매튜와 이사벨이 지켜 보는 가운데서 테오가 자위를 한다든지, 테오가 지켜 보는 가운데 매튜와 이사벨이 섹스를 한다는 설정은 자위와 섹스를 스크린 속의 행위로 인식하는 것이지 난교나 관음과는 상관이 없다. 앞서 인물들의 나체와 섹스를 염탐하는 카메라의 시선이 음란하지 않음으로 해석된 건 결국 카메라의 포커스가 보편성의 테두리를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섹스에 대한 관점이 이 정도로 편협한데 그 섹스와 연관하여 하나의 주의를 형성해 온 정치가 취할 결론이 보수성 또는 패배주의 외에 무엇이 있었을까. 이제서야 되짚어 보는 바지만 과연 그에게 있어 성정치학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많은 평자들이 지적하는 베르톨루치 영화의 센세이셔널리즘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관객이 이 영화에서 건져낼 수 있는 최고의 미덕은 노스탤지어다. 노스탤지어의 매개는 영화 전체가 아니라 영화 전반에 걸쳐 산발적으로 흩뿌려진 인서트 숏들 - 앙리 랑글르와 해임 반대 시위와 모션퀴에 등장하는 영화들 - 과 세 젊은이들의 논쟁에 등장하는 그 시대 대중 문화의 흔적들이다. 그게 전부다. 이 영화는 혁명의 시절에 혁명의 변두리를 배회하지만 그 전선에는 합류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불현듯 시위대의 인파에 합류한 그들을 잡은 정지화면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와 동격이 될 수 없다. 혁명이 대단한 것은 아니나 노스탤지어의 일부로 수렴되기에는 부피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빼어난 이미지와 칼날같은 대사의 틀 속에 담긴 영화에는 기품 있는 노스탤지어가 서려 있지만 영화는 끝내 입체감을 얻지 못하고 평면에 머물고 만다. 20세기의 많은 영화들이 성공보다 값진 실패라고 말한 '68 혁명'을 추억의 '꺼리'로만 못박아 버리는 감독의 태도에는 안일한 나르시스트의 자기애라는 악취가 짙게 풍긴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 <몽상가들>은 베르톨루치 자신만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다. 예술이라 칭하는 모든 행위들이 근본적으로 작가 개인의 삶을 반영하는 사적 영역이라고 전제해도 이 영화에는 너무 많은 베르톨루치가 어슬렁거린다. 그 많은 베르톨루치들이 영화를 통해 내세우는 명분은 혁명과 개인의 관계 해부지만 속셈은 자기 미화와 변명이다. 이 영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감독 자신을 순수주의자로 미화하고, 과거의 모순된 행적을 순수라는 모호한 단어로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순수한 열정, 순수한 영화 사랑, 순수한 여체 탐미, 순수한 에로티시즘, 순수한 개인주의, 순수한 변절, 순수한 열등감, 그 모든 순수를 한 두름으로 꿰어 내는 지극히 순수한 몽상. 어쩌면 베르톨루치는 순수와 경솔을 혼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영화가 의도하는 자기 미화와 변명에는 노골적인 번복의 제스처가 함께 한다. 자신을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했던 아버지를 동등한 입장에서 아들과 논쟁하고, 아이들의 일탈을 관용으로 끌어안는 진보적인 인물로 탈바꿈 시키는 것을 뒤늦은 각성이라 쳐도 70년의 연출작 <순응주의자>에서 일방적인 절교를 선언했던 고다르에 대한 뒤늦은 찬미는 납득하기 어렵다. 그것도 고다르가 가장 경계했던 자본주의자의 윤택한 주거지에 고다르를 초빙한다는 것은 더더욱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베르톨루치의 번복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베르톨루치는 자신이 부정한 것을 긍정으로 번복함과 동시에 긍정한 것도 부정으로 번복한다. 성과 정치를 등치시키고, 관능의 몸짓과 본능적 쾌락으로 혁명을 대체하던 그가 섹스와 혁명을 순차적으로 나열한다는 것은 자신의 데카당스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여전히 변함없는 것은 변절에 대한 알 수 없는 소신이다. 영화 감독이기 이전에 열렬한 공산당원이었던 베르톨루치는 테오와 이사벨 남매의 가정을 부르주아 지식인 가정으로 설정하면서 자신의 정치 이력에서 공산주의를 다시 한번 부정해 버린다. 어찌 보면 이것은 정직한 커밍아웃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집단의 일원이기보다는 철저한 개인이었던 그에게 이데올로기는 전염성 강한 센세이셔널리즘이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당사자 1인에 한정 짓지 않고 그 시대 대다수의 타자들에게까지 동조를 요구하는 것은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행위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고 거의 동시에 국내에 상륙한 이 상일 감독의 <69 식스티나인>은 '혁명? 좆 까라 그래!'라고 당당하게 외친 영화였지만 이 영화는 '혁명? 글쎄요...'라고 얼버무린 영화다. 베르톨루치는 왜 좀 더 솔직하지 못하고 궁색한 변명에만 연연했을까?

2005. 04. 14. 山ZIGI VINAP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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