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표적인 영웅들 중에 특히 '배트맨'이라는 캐릭터는 동경의 대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위화감을 잔뜩 조성했던 것이 사실이다. 슈퍼맨은 원래 외계인(?)이었으니 타고난 능력이었고, 스파이더맨은 비록 슈퍼 거미에게 물려 초능력을 갖게 됐지만, 세상사 힘든 일을 다 겪는 서민 입장인지라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배트맨은 든든한 집사 아저씨까지 받쳐주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거대한 기업까지 갖고 있는 대재벌에 가까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화려한 활약상을 봐도 '저건 다 돈이 되니까 할 수 있는 일이지'하는 느낌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진지한 고민을 하더라도 그 화려한 배경에 상대적으로 가려지기 일쑤였고. 1,2편, 아니 3편까지만 해도 괜찮았으나 4편에 들면서 그나마 있던 배트맨의 어두운 고민은 거의 사라진 채 화려한 활약상만 담으니, 도무지 이 검은 박쥐 영웅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인간적인 매력이라는 게 남아 있나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러나 이번 '배트맨'의 다섯번째 이야기 보따리 <배트맨 비긴즈>는 다시 그의 우울증 유발하기 십상이었던 젊었을 적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 비록 남부럽지 않은 화려한 배경을 지니고 있지만, 사실 이 영웅의 뒤편에는 인간적으로 견디기 힘들었던 진지한 고뇌가 담겨 있었다, 이 말이다. 가상 도시 고담에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좌우명 삼아 봉사하며 살아가던 부유한 부모를 둔 아이 브루스 웨인(크리스찬 베일). 여느 평범한 어리광 많은 아이들과 다를 바 없던 브루스는 이 어렸을 적에 두 가지 사건으로 인해 일생일대를 좌우할 공포증을 갖게 된다. 첫번째는 절친한 친구 레이첼과 놀다 실수로 떨어진 우물같은 구덩이 속에서 난데 없는 박쥐 떼의 출몰을 목격하게 되면서이고, 두번째는 자신의 요청으로 오페라장에서 일찍 함께 나온 부모가 강도의 총격으로 사망하게 되면서이다. 특히나 브루스는 부모님의 죽음을 자신의 탓이라고 여기는 죄책감을 분노로 왜곡시켜 세상에 대한 어긋난 증오심을 품게 된다. 한동안 방황하던 브루스는 우연히(혹은 계획적으로) 자신을 찾아온 헨리 듀커드(리암 니슨)라는 인물을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는 브루스에게 두려움을 없애는 법을 가르쳐주고, 부조리한 세상을 응징하라는 의미에서 보다 강력한 자신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전수해준다. 그러나 실컷 배우고보니 듀커드가 속한 이른바 '어둠의 사도'라는 집단은 고담 시를 부패했다는 이유로 거의 말살시키려는 테러에 가까운 일을 계획하고, 이건 안되겠다 싶었던 브루스는 그 집단에서 나와 다시 고담으로 돌아오게 된다. 부와 권력으로 고담 시를 맘대로 휘두르는 갱단, 탐욕으로 가득차 고담 시를 위기에 몰아넣는 과학자 등 온갖 부패한 인물들로 가득한 고담 시에서, 브루스는 이들을 응징하고 보다 나은 고담 시를 만들기 위해 나서는데... 일단 전편들에 등장하던 배우들과는 전혀 다른 배우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것이 영화 전체의 분위기가 새삼 다르게 보이는 데 일조한다. 역대 배트맨 배우 중 가장 젊은 나이에 배트맨을 맡았다고 할 수 있을 크리스찬 베일, 기존의 선한 스승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악역 리암 니슨, 반대로 기존의 악한 이미지와 영 다른 선량한 경찰 역의 게리 올드먼, 보다 활동적이고 유머러스해진 집사 알프레드 역의 마이클 케인, 007의 무기공급원마냥 브루스 웨인에게 지속적으로 좋은 무기들을 공급해주는 폭스 역의 모건 프리먼 등 기존 시리즈와 다른 면이 많은 캐릭터들이 보다 새로운 재미를 더해주었다. 어느 누가 연기를 빼어나게 잘한다든가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야말로 호화캐스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배우들이 서로 조화가 잘 되어 누구하나 뒤쳐짐 없이 캐릭터를 잘 소화하지 않았나 싶다. 크리스찬 베일은 젊었을 적의 브루스 웨인 역할이고 실제로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만큼 연기에 있어서 보다 활동적이고 다이내믹하다고 볼 수 있겠다. 기존의 배트맨처럼 신사적인 매너는 다 갖추는 캐릭터만은 아닌, 가끔씩은 공공파티장에서 '깽판'도 부리고 악당 앞에서 심하게 흥분해 다그치기도 하는 등 아직 절제되지만은 않은 배트맨 초기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거기에 이전에 맡았던 역할들에서도 비슷한 연기를 해서인지 과거의 상처때문에 고뇌하는 영웅이 아닌 '인간' 배트맨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기존의 이미지와는 다른 역할을 맡은 두 배우, 리암 니슨과 게리 올드먼의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리암 니슨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대작 영화에서 연이어 스승 역을 맡았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1>에서는 오비완 케노비와 아나킨 스카이워커를 키우고, <킹덤 오브 헤븐>에선 발리안을 키우더니만 이제는 배트맨까지... 그야말로 쪽집게 선생(?)이라고 아니할 수 없겠다. 그러나 악을 응징한다는 데 있어서 신념은 같지만, 그 방식과 사고관의 차이로 인해 브루스와 갈등하고 결국은 악역이 되는 모습이 사뭇 새로웠다. 선량한 인상이라고 할 수 있을 그가 마구 발길질을 해대고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이 의외로 다가온 만큼, 듀커드라는 악역은 <배트맨> 시리즈의 기존 악당들을 잊는 입체적인 성격의 악당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게리 올드먼은 <레옹>으로 대표되는 지독한 악역 이미지를 이 영화에서 단숨에 벗어버린다. 하긴, 전작인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서도 선한 역으로 나오긴 했었다. 유난히 최근 들어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는 듯 보이는 게리 올드먼은, 이 영화에서 소심하지만 정의를 따르고 줏대 있는 제임스 고든 경관 역을 잘 소화해냈다. 안경을 쓰고 수염을 기른 조용한 중년남자의 모습은, 기존의 다소 '미치광이'스럽던 게리 올드먼에게도 참 잘 어울렸다. 집사 알프레드 역의 마이클 케인은 전체적으로 무거운 극 분위기 속에서 의외로 소소한 웃음을 전해주었다. "아직 날 포기하지 않았어요?"라는 브루스의 질문에 "결코"라고 답할 만큼 충직한 집사이면서도, 따끔한 충고 또한 잊지 않는 강직한 집사 역을 재미나게 보여주었다. 그 위험한 화재 상황 속에서도 나무 기둥에 깔려 끙끙거리는 브루스에게 "매일마다 푸쉬업하면서 이거 하나 못들어올려요?"라고 면박주는 센스까지 곧잘 발휘한다. 수퍼히어로물답게 액션 장면들도 기대를 만족시켜준다. 전체적으로 영화가 어두운 분위기라 좀 지루했던 부분도 없지 않지만, 시시각각 나오는 배트맨의 무술 격투신은 동양적인 분위기도 풍기면서 파워가 넘치고, 배트모빌의 전신이라고 할 만한 배트맨의 자가용 '텀블러'의 중량감 있는 추격신, 그리고 결말부에 펼쳐지는 전차 추격신 등 첨단 장비들과 무술 등을 이용한 액션 장면들은 역시 배트맨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이번 다섯번째 배트맨 이야기의 중요한 키워드를 한 단어로 집약하자면 바로 '두려움(Fear)'이다. 브루스가 배트맨으로 거듭나는 계기도 이것 때문이고, 그가 배트맨이 되어 내세우는 무기도 이것이고, 후반부에 고담시를 위기로 몰아넣는 바이러스도 결국 이 '두려움'이다. 영화는 이 두려움이라는 명제를 통해, 브루스가 배트맨이 되고 활약하면서 악당들을 소탕하며 어떻게 '두려움'과 맞서게 되며, 어떻게 정신적으로 성장하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사실, 배트맨의 가장 첫번째 이야기를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배트맨, 혹은 브루스 웨인의 모습은 의외로 소심한 구석이 많다. 어렸을 때 목격한 박쥐떼와 부모의 죽음을 평생의 두려움으로 살아간 채 아킬레스건처럼 여겨 숨기고 살아가고, 적들과의 대면이나 위기 상황에서 이런 두려움을 들키게 되면 여느 사람들처럼 힘없이 주저앉아버리는 게 현실이다. 고담 시를 위기로 몰아넣는 크레인 박사(킬리언 머피)의 약물에 노출돼서도 브루스는 영웅답게 맞서지 못하고 그 치명적인 두려움에 몸부림치며 그저 악당에게 당하기도 한다. '밤의 황제'답게 물불 안가릴 것 같은 인상에 비해서 의외로 참 겁을 많이 먹는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브루스는 점차 주변인물들로부터 이 두려움이라는 가장 무서운 약점을 제거해나가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오히려 두려움을 자신의 결정적 무기로 만들고, 자신이 그 두려운 존재가 되어 악의 세력들에게 그 두려움을 같이 경험하게 하라는 것이다. 어렸을 적 가장 치명적인 공포증을 유발했던 박쥐라는 동물이 배트맨의 상징이 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더 이상 두려움을 주는 그것들을 피하지 않고 한몸이 된 것마냥 받아들이고, 내가 그 두려운 존재가 된 것처럼 변화하면서 내면에 켜켜이 쌓인 두려움을 극복해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은 한때 가장 두려워했었던 박쥐떼들은 친구인양 달고 다니며 활약할 수 있게 된 것이고. 고담 시를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을 약물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를 목격하게 하는 부작용을 일으킨다는 설정도 이러한 배트맨의 '두려움 극복하기'와 일맥상통한다. 약물에 노출돼 세상 모든 것들이 가장 두려운 존재로 보이고, 이를 없애려고 도시를 배회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좀비를 연상케 할 만큼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결국 '두려움'에 당당히 맞서지 못하고 자신이 미약하다고 인정하게 되면 그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이성조차 마비되기까지 할 수 있는 게 인간이 아닌가하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전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배트맨의 성장도 이러한 점에서 반드시 필요했던 점이기도 했을 것이고. 이렇게 이 영화 <배트맨 비긴즈>는 여느 수퍼히어로물처럼 그들의 신이한 능력을 보여준다거나 악당과 대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다. 가진 돈이 많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영웅노릇하기 쉬웠을 브루스 웨인이지만, 그것마저 위협하는 가장 치명적인 독이 되었을 어린 시절의 '두려움'을 어떻게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꿔나가면서 유연하게 대처해나가는가 그 방법을 터득하며 내적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담은, 어떻게 보면 '성장영화'인 것이다. 악역이 여타 시리즈처럼 주인공과 대적할 만한 독자적인 카리스마를 가지지 않는 이유도 이런 점 때문이 아닐까 싶다. '두려움'을 약점이자 무기로 지니고 있었던 배트맨의 무용담은, 이렇게 '인간' 배트맨의 정신적 성장기를 통해 비로소 첫 스타트를 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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