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고, 인간에게 싸고 먹고 자고픈 본능이 있다는 것이 참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동막골에서 우연히 마주친 국군과 인민군. 상대방의 존재에 잔뜩 긴장하며 대치하고 있을 때, 이들이 서로에게 겨누고 있는 총부리 사이로 호호백발의 할머니 하나가 호물호물 지나간다. 인민군 리수화는 할머니에게 움직이지 말라며 고함을 치지만 본능에 충실한 할머니는 뒷간으로 가던 걸음을 재촉할 뿐이다. '꼼짝 말면, 그럼 똥은 치마에 누란 소리냐' 하고 당당히 반문하면서. 죄없는 목숨을 수천 수만 앗아가면서까지 펼쳐진 이데올로기 싸움이었지만, 그 거룩하디 거룩한(?)이데올로기 문제도 웁스, 배설의 본능 앞에선 별 대수로운게 못 된다. 그리고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던 병사들에게, 총부리 사이를 심상히 지나가는 시골 할머니는 참으로 어이없고 맥빠지는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이번엔 마을 사람들. 종간나 새끼들 조용히하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리수화의 주문에도 불구하고 옆에서 수군수군 아주 난리가 났다. 멧돼지가 마을 사람들이 공들여 일구어 놓은 알감자 텃밭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다닌다는 것. 사람들은 겨우내 먹을 식량을 못쓰게 해놓은 요 못된 멧돼지를 어떻게 혼내줄까 저마다 의견을 짜내기에 바쁘다. 누구는 거룩한 이데올로기를 수호해내고자 싸지도 먹지도 못한 채 하루 종일 겨누고 있는 총 때문에 팔 저려 죽겠는데 누구는..아까부터 단연 싸고 먹는 바로 그 문제로 심각하기 그지 없다. 에고 힘 빠진다 힘 빠져.
결정적으로 이 대치 상황은 하룻밤 꼬박 새워 제 자리에 목석처럼 서서 버티고 있던 병사들이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는데, 마을사람들이 이들을 한 방에 옮겨 혼숙(?)시키는 것으로 끝난다. 부락민들은 의당 자기네들이 졸리우면 그러는 것처럼 이들도 소박하지만 정감있게 뜨뜻한 아랫목에서 같이 살 부비며 잠드는 쪽을 선호할 거라 생각했나보다. 천만에! 적과의 동침이다! 그러나 적군을 향한 증오며 아군을 향한 충성심 그리고 무엇을 향한 것인지도 모르는 맹목적 신념이여. 천근만근 내려감기는 눈꺼풀 앞에서 어쩔 것이냐,
이 싸고 먹고 자고픈 천진한 본능 앞에서 어쩔 것이냐.
탁 까놓고 말해서, 우리는 싸고 먹고 자고 하는 것이 일차적인 욕구라며 '천한 것'하고 깔아뭉개지만, 사실 이보다 중요하고 숭고한 인생의 테마가 어디있겠는가? 막스도 유엔군도 김정일도 인민군도 국군도 너도 나도 이 짓을 해야 제대로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하나 갖춰진다.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한 동막골인들의 순진한 몸짓은 대치상황의 긴장감을 알게 모르게 녹여버렸다. 또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해 표현철과 리수화 일행은 자의든 타의든 '잠시 휴전'을 외쳐야만 했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본능을 필요 이상으로 억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종종 힘을 얻는 건, 다만 세상의 몇몇 사람들이 본능을 제대로 부릴 줄 몰라 쓸 데없는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탐욕스러운 전쟁은, 한민족을 애틋히 그리는 본능을 정의에 역하는 치욕스러운 것으로 매도하며 억누르는 사회분위기를 양산해내지 않았는가.
동막골, 부락민들이 여름내 키운 알감자 수확하면 부족할 것도 넘칠 것도 없이 서로 조금씩 공평하게 나눠먹으며 한 해 나는 곳. 아이('동'童)처럼 '막' 자라라는 의미를 가진 마을 이름처럼 부락민들은 아이들만큼이나 천진한 마음으로, 자신의 본능을 지나치게 억누르지도 지나치게 남용하지도 않으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 소박하지만 눈물나게 아름다운 마을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일 것이다. 이 사람들 눈에 본능 충족 이상의 쓸 데 없는 탐욕에서 비롯된 전쟁은 먼 꿈나라의 얘기요, 다만 연합군의 폭격은 밤하늘을 수놓는 아름다운 불꽃놀이로 수류탄에 터진 옥수수알은 청명한 하늘에 흩날리는 황홀한 눈발로 여겨질 뿐이다. 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동막골에 동화될 수 있다면.
이 영화는 영상미가 아주 탁월했는데, 자연을 한 폭의 산수화처럼 굉장히 아름답게 옮겨다 놓았다. 그러고 보니 자연은 동막골 사람들과 닮았다(사실은 그 반대겠지만^^): 필요한 것이라면 취하되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또 마음이 넉넉하여 이유없이 남을 내치치 않는다. 사실은 이유가 있다해도 모질게 내칠 줄을 모른다. 인간은 전쟁으로 인해 같은 인간을 죽였을 뿐 아니라 자연에도 씻지 못할 과오를 저질렀다. 그러나 영화 마지막 장면, 흰 눈꽃송이가 무심히 설원 위에 쌓여 쓸데없는 욕심과 증오로 벌어진 전장의 상처들을 감쪽같이 덮어놓는 것처럼 자연은 탐욕스런 인간을 조용히 타이르고 어루만짐으로써 다시 시작할 기회를 준다. 마치 동막골 사람들이 표현철과 리수화에게 비틀리고 소모적인 분노에서 벗어나 맑은 마음, 즉 솔직하고 천진한 본능을 현명하게 부릴 줄 아는 마음으로 다시 세상을 바라볼 기회를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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