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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ap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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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03 오전 1:57: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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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는 불완전한 반영웅 배트맨의 과거사를 탐구하는 영화지만 전형적인 프리퀄 영화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치유불능의 우울증을 안고 살던 배트맨이 그 딜레마에서 빠져나와 영웅의 면모를 과시하고, 고담시 내부의 추악함에서 배양되던 악의 세력이 부패한 도시를 섬멸하려는 외부세력으로 대체되는 설정이 이전의 시리즈 - 조엘 슈마허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나 이 글에서는 팀 버튼이 연출한 두편만 오리지날 시리즈로 간주한다 - 와는 명백하게 구분되기 때문이다. 이 간극을 단순하게 팀 버튼과 크리스토퍼 놀란의 취향 차이로 일축할 수도 있는 문제지만 무정부적, 탈정치적이던 배트맨을 내셔널리즘의 수호자로 둔갑시킨데 대한 책임은 반드시 물어야 할 일이다.
팀 버튼의 연작에서는 암시적으로만 언급되었던 '브루스 웨인, 배트맨 되기'의 과정을 놀랍도록 치밀하게 묘사한 극의 전반부는 나무랄데 없이 훌륭하다. 불친절한 팀 버튼씨께서 창조한 어둡고 우울한 배트맨은 어떤 슈퍼 히어로들보다 매력적이었지만 그래도 관객은 만족할 수 없었다. 그 애정어린 불만족을 해소시켜 주기에 이 영화의 전반부는 차고도 넘친다. 복수심과 트라우마때문에 이중의 삶을 살게 된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이중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건 분명 솔깃한 명분이 아닌가. 그 명분을 이끌어내기 위해 투자된 장고의 시간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의 수호의 필요성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가면을 쓰게되는 후반부가 문제다. 브루스 웨인/배트맨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배트맨이 상대하려던 내부의 적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그 자리는 외부의 침략자가 차지한다. 브루스 웨인이 사적복수를 행하려던 부모의 살해범이 내부의 거대한 적 카마인 팔코니에 의해 일격에 제거되듯 카마인 팔코니는 외부의 세력에 의해 너무도 허망하게 제거된다. 그 외부의 침략자들은 고담시를 완전히 소멸시키려는 유색인 일색의 테러 집단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를 던지자면 왜 진정한 적은 추악한 내부자가 아닌 외부의 세력인가하는 점이다. 이는 분명 오리지날 시리즈에 대한 명백한 반역이자 정치적 필요가 영화의 주제를 잡아먹어버린 끔찍한 전환이다.
<메멘토>나 <인섬니아>에서도 그랬듯이 이 영화의 공간과 사건과 인물은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또는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결합되고 맞물려 있다. 놀란표 영화들의 공간은 표면적으로는 강압적이고 폐쇄적이다. 그리고, 내부는 사막처럼 황폐하고 허하다. 팀 버튼이 창조한 눅눅한 습지같은 공간과는 차이점이 있지만 인물의 내면을 잠식하는 미묘한 불균질성에는 분명 일치하는 무언가가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으로 대치되는 두 공간, 고담시와 '그림자 연맹'의 요새는 공통적으로 강압적이고 폐쇄적이다. 그리고, 공간과 공간은 이질적이고 서로에게 불친절하다. 그 공간의 내부는 인물의 내적 갈등을 충동질하기도 하고, 혼란을 조장하기도 하며 때때로 공간은 인물의 내면을 시각화하기도 한다. 결론에 이르러서는 이 두개의 상이한 공간이 영화가 말하는 정의와 불의의 요람인 셈인데 후반부에서 드러나는 두 공간의 극명한 대립은 깊이도 없을뿐더러 보기에도 불편하다. 팀 버튼이 애써 외면했던 고담시의 낮 풍경은 현재가 아닌 미래형의 공간이다. 가까운 미래의 뉴욕에 대한 상상도라고 여겨질 정도로 뉴욕과 흡사한 이 도시의 중심에 버텨선 것이 웨인가의 기업이다. 배트맨은 웨인가로 상징되는 거대자본을 바탕으로 탄생한 현대과학의 총아다. 그에 반해 '그림자 연맹'의 요새는 고대로부터 현재 이전까지의 공간이다. 히말라야 산맥이라는 개발불능의 오지에 웅크린 이 요새는 위험한 정의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여기서 다시 질문 하나를 더 던지자면 고담시는 왜 미래지향의 문명의 공간이고 '그림자 연맹'의 요새는 왜 퇴보지향의 반문명의 공간인가 하는 점이다. 해답은 너무 뻔한 곳에 있다.
좋게 말하자면 <배트맨 비긴즈>는 치밀한 연출과 설득력있는 내러티브로 정의라는 대의명분과 영웅다운 영웅을 결합시킨 영화지만 지금껏 관객이 흠모해 온 배트맨의 진면목에서는 멀어도 한참이나 먼 영화다. 뿐만 아니라 과도하게 명징해진 선과 악의 구분때문에 지나치게 교훈적이고 또한 부담스러운 결말에 봉착한 영화다. 부패한 도시의 범죄자들을 응징하는 밤의 영웅이 알고보니 고탄력 라텍스로 실체를 가린 부르주아더라는 원작 자체가 모순적이었지만 그 모순에는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모순은 고담시로 상징되는 거대국가 미국의 이데올로기고 불균형하게 발전한 첨단산업사회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팀 버튼은 거두절미하고 그 모순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미국인이 편애하는 영웅놀음의 허구를 통렬하게 비꼴 수 있었다. 그러나, 놀란은 이 중차대한 미덕을 영화의 전반부에 일단락지어 버리고는 불완전한 반영웅 배트맨을 영웅적 면모가 유난히 돋보이는 슈퍼 히어로로 둔갑시켰다. 그것도 국가정의를 대변하는 거국적인 영웅으로 말이다. 원하지 않는 대상에게 어울리지 않는 명함을 던져주고 국가정의의 상징 노릇을 하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그 대상과 관객을 동시에 상해하는 가혹행위다. 어떤 초인적 능력도 가지지 못한 배트맨의 육체는 거대국가 미국의 편파적인 정의를 짊어질 만큼 튼튼하지 못하다. 게다가 배트맨은 이제 시민들의 안전뿐만 아니라 브루스 웨인의 재산과 안전까지 지켜야 한다. 그러자면, 사단병력의 배트맨들을 양성해야 하지 않을까?
9.11 사태 이후 미국 사회의 분위기는 테러에 대한 불안과 강력한 군사력에 대한 열망이 지배하고 있다. 이 영화는 그 불안과 열망을 현실보다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고, 미국의 패권주의를 정당한 것으로 미화하고 있다. 놀란의 배트맨이 화려해진 이력서에 비해 특별한 매력을 발산하지 못하는 이유는 노골적인 현실반영때문이다. 감독은 현실세계의 외부에 있던 배트맨을 현실세계에 우겨넣어 내부자들의 불안을 다독거리고 열망을 해소시켜줄 정치적인 인물로 완성하려 했다. 과거의 배트맨이라고 해서 완전히 현실과 단절되었던 것은 아니나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할 정도로 경솔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놀란의 배트맨은 어이없게도 미국정부의 대변인 노릇까지 자청하고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연출의 <미스틱 리버>가 눈물겨운 가족주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국가 이기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이 영화도 미국사회의 일그러진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결론을 대신해 감히 이런 바램을 가져본다. 현실이 불안하다면 남의 나라 국민들 불안하게 군사력 강화에 열을 올릴 것이 아니라 불안의 본질적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애쓰고, 그 원인은 가급적 내부에서 찾아주었으면 한다.
2005. 08. 02. 山ZIGI VINAP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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