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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판인가, 동어반복인가 친절한 금자씨
sieg2412 2005-08-07 오후 5:29:11 1192   [10]

극장을 나와서도 한동안 눈이 어지러웠다. 점차 색이 빠지는 필름을 두시간 꼬박 응시한 끝에 내 눈동자도 탈색되었나보다. 아직 영화를 안 본 분들께 말하자면, 이 영화는 (비록 컬러 버전은 보지 못했지만) 차차 색이 빠져 종국에는 흑백 필름으로 전환되는 디지털 상영 버전이 낫다고 감히 자부하겠다. (CGV 강변, 용산, 구로에서 상영중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박찬욱의 지난 "복수" 연작에서 진정으로 나타난 복수의 완성형이랄 것은 없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동진(송강호 분)은 류(신하균 분)와 영미(배두나 분)에게 유괴의 복수를 해치우지만, 결국 그 자신도 노동자 테러리스트(오광록 분)에 의해 죽음을 맞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의 복수는 행해지지 못했다. <올드보이>의 오대수(최민식 분)는 이우진(유지태 분)을 찾아내지만 진실을 알아낸 뒤 도리어 자신에게 형벌을 내린다. (그러고 보면 <올드보이>의 주제는 복수가 아니었던 듯 하다) 그렇기 때문에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이영애 분)가 백 선생(최민식 분)을 뒤끝없이 처리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고, 결국 "어떻게 복수하느냐"가 아닌 "어떤 식으로 복수가 어그러지느냐"는 물음을 갖고 영화를 본 셈이 되었다.

그 답을 찾기 전에, 금자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금자는 교도소 안에서 신앙 간증을 한다. 나야 개신교는 아니라서 잘 모르지만, 그거 아무나 하는 건 아닐텐데. 어찌됐든 금자는 말한다. "내 안의 천사는 내가 부를 때만 '저 여기 있어요'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부르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다."

처음 입감되는 순간부터 보여지는 몇몇 동료들과는 달리 금자의 입감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만, 금자는 초기부터 치매에 걸린 남파간첩의 수발을 돕는 등 선행을 일삼는다(?) 그래서 금자의 초기 이미지는 "친절한 금자씨"다.
그러나 감방을 주름잡던 마녀(고수희 분)에게 3년간 락스를 먹여 죽인 뒤, 금자는 "친절한 금자씨"와 "마녀 이금자" - <마녀 이금자>는 <친절한 금자씨>의 초기 제목이었다. - 두 가지의 이미지로 군림하게 된다. 그리고 출소한 금자는, "마녀 이금자"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친절한 금자씨"는 더 이상 될 수 없다. 그건 떨어진 두부 조각과 함께 금자 자신이 버린 이미지다.

어찌됐든 복수를 마친 금자는 자신이 만든 두부 모양의 케이크에 얼굴을 쳐박는다. 또한 금자 자신이 소원한 것은, 원모를 만나 꼭 사죄하는 것이었다. 금자의 복수는 오대수의 그것이나 동진의 그것처럼 범죄자의 처단 혹은 응어리의 해결 같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속죄를 궁극적인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 그러니까, "니가 내 딸을 유괴해서 죽였으니 죽여버린다"라거나, "나를 15년이나 영문도 모른채 가뒀으니 죽여버린다" 가 아닌, "너를 죽여서 용서를 받겠다"는, 이른바 '속죄'의 모티프를 안고 있는 복수다. 이 경우에서 복수는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다시 원래의 물음으로 돌아가서, 금자 안에는 천사가 있는가? 분명 금자에게도 아쿠아리움 때와 같은 순수한 때 - 비록 날라리였지만 - 가 있었다. 그것을 천사라고 볼 것인가? 수형 생활 동안 "친절한 금자씨"라고 불리던 금자 안에는 천사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은 알 수 없는 물음이다.

말했다시피 영화는 특정 상영관에서만 디지털 상영되고 있는데, 감독은 최종판으로 이 탈색 프린트를 선택했다가 다시 컬러 프린트를 선택했다. 탈색 프린트를 고집한 이유는 "내가 아니면 누군가가 시도할 것, 내가 먼저 하겠다"는 욕심에서였고, 다시 돌아간 이유는 "관객이 그것에 시선을 빼앗길까봐" 라고 하는데, 솔직한 감상에 의하면 탈색 프린트가 나았다고 본다. 아무튼 나는 이 디지털 색보정의 결과물이 한때 최종선상에 오른 이유가 단지 기술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겠다. 뭔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

백 선생은 박찬욱의 전작에서 보여진 악역이나, 그 외 요즘 영화에서 쉽게 보이는 악역과는 동떨어져 있다. 그에게는 그만의 "사연"이 없다. 이래저래 사연 있고 악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충분하다 못해 철철 넘쳐흐르는 요즘의 악역 세계에서 백 선생같은 절대악은 굉장히 독보적인 존재다. 그래서 그는 개체로 읽히지 않고 무언가에 대한 상징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백 선생은, 아이를 귀찮아해서 유괴하자마자 바로 죽이고, 녹음된 목소리를 피해자에게 들려주면서 돈을 뜯어냈다. 그렇게 다섯 어린이를 죽이면서 돈을 뜯어낸 이유는 바로, 요트를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이쯤 되면 거의 용서의 개념이 사라진 순수악에 가깝다. 이런 절대악의 이미지는 복수의 후반부에 이르러 거의 완전히 탈색되어 흑백을 보여주는 영상과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낸다.

박찬욱 감독은 일찍이, "이 영화의 후반부 1/3은 전혀 다른 영화다"라고 말한 바 있다. 금자의 수형 생활을 비롯, 출소한 직후부터 나루세에 취직하는 갖가지 에피소드를 보여주는 과정에서 영화의 색감은 풍부하다. 그러던 것이 점차 색이 빠져서, 폐교에서의 본격적인 복수극이 시작될 때 쯤에는 별다른 색을 나타내지 않고, 급기야 피해자의 가족들은 무슨 색 옷을 입었는지 그다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복수가 끝난 뒤에는 누가 누구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당초에는 저마다 다른 것 같은 인간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혹은 극한 상황에 치달아 갈수록, 또는 그들의 마음 속 깊숙히 박혀 있는 탐욕이 드러날만한 상황이 나타날수록 흑백, 즉, 절대악과 절대선의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 구분되며 종국에는 그마저 구분되지 않는, 흡사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라던 누군가의 말이 떠오르는 상황을 연출하고 만다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누구의 말인가. 홉스는 대표적인 사회 계약설 이론가이자 성악설의 대가이다. 복수가 시작될 때 그 개개인은 참으로 다른 사람들이다. 세현네 부녀(오광록 외)는 겉보기에도 참 곤궁하게 생겼고, 은주네 엄마는 자살했고 아버지는 이민을 가서 복수극에 할머니가 동참하게 된다. 이혼한 집도 있고, 겁이 많아 아들을 죽인 자를 처벌할 용기도 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들은 복수가 끝난 뒤 마치 생업에 종사하듯 시체를 치우고, 피를 닦는다. 모여앉아 케이크를 먹으며 잠시 청승을 떨어 보지만, 곧 저마다 계좌번호를 적어 내민다. 그리고는 눈이 와서 집에 갈 길을 걱정하며 나루세를 나선다. 이 장황한 묘사 안에 들어있는 인간의 본질적 동일성은 은주 할머니의 말에서 좀 더 명민하게 느낄 수 있다. "여기 그런 사정 없는 사람 어딨나." 즉, 박찬욱은 피해자로 부르주아 - 잊었나? 원모네 집은 동부이촌동 산다. - 부터 빈곤층 - 사실 빈곤층은 오광록 가족 밖에 없다만 - 까지 다양한 계층을 모아놓고, 공통분모에 의한 내적 동일시를 통해 이들을 전부 일직선상에 놓은 뒤, 한꺼번에 탐욕의 존재인 인간 자체로 격하시켜버린다. 박찬욱은, 그의 복수론은 무엇일지 몰라도 그의 인간론은 성악설을 신봉하는 모양이다.

여담인데, 이 영화 역시 박찬욱의 재기넘치는 컬트적 연출이 빛난다. 가령 순서를 정하자는 금자의 말에 바로 이어서 원모 엄마의 1번 제비를 대뜸 연결하는 편집이나, 피해자들을 일렬로 주욱 앉혀놓고 천연스럽게 도끼를 조립하는 세현 아버지의 모습을 잡은 장면 같은 경우, <올드보이>에서 15년간의 상상 훈련을 운운하는 코믹한 장면과 연결되어, 박찬욱의 풍부한 영화적 지식과 경험이 감독 본인에 의해 차마 자제되지 못하고 스크린에 흘려진 재미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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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금자씨(2005, Sympathy For Lady Venge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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