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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B. 올드보이
keenkim 2005-08-22 오전 1:34:45 1531   [3]
나에게 처음 ‘이거다! 한국 영화는 이제 됐다!’라는 확신을 준 영화는 <공동경비구역 JSA>(2000)였다. 그래서 비록 때늦긴 했어도 내가 <올드 보이>(2003)를 본 이유는, 박찬욱 감독이란 이름만으로 충분했다.

노루가 사냥군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 잠언 6 : 5

위 성경 구절은 이우진(유지태)이 오대수(최민식)에게 던진 저주와 같은 충고이다 (오대수는 “잠언 6장 4절”로 착각했었지만). 이건 마치 빌닷(Bildad)이 친구 욥(Job)에게 했던 말 –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기 8 : 7)는 말처럼 조롱기가 잔뜩 섞인 언사인 것이다. 그러나 오대수는 누군가의 손에서 벗어나거나, 스스로 구원하는 것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오직 그의 관심은 “Why?”였다. 왜 내가 사냥꾼의 손에 잡혔으며, 왜 내가 그물에 걸렸는가? 영화 속에서 직접 언급은 안 되었지만,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해답도 역시 <잠언>에서 찾을 수 있다.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잠언 6 : 2).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로 인해, ‘억울하게’ 곤경에 빠진 경험은 (그 곤경이 크든 작든)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진중권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입을 빌어 설명한 ‘훌륭한 비극의 조건’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셈이다:

훌륭한 비극이 되려면,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 악행이 아니라 악의 없는 중대한 ‘과오’의 대가로 불행해져야 합니다. 가엾다는 감정은 부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생기고, 두려운 감정은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생기니까요. --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1>, 새길, 2001, p. 105

엄마의 비참한 죽음을 알아버린 연산군(燕山君)은 복수의 화신으로 돌변했었다. 그는 환관들에게 “입은 화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니, 입을 다물고 혀를 깊이 간직하면 마음 곳곳이 편안하리라”(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 閉口深藏舌, 安心處處于)고 적힌 신언패(愼言牌)를 목에 걸고 다니게 했다. <올드 보이>의 이우진도 연산군에 뒤지지 않는 명언을 남긴다. “모래알이든 바위 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긴 마찬가지다!” 연산군과 이우진의 공통점이 있는가? 있다. 둘 다 “괴물”이다. 괴물-이우진은 오대수 안에 잠재된 괴물을 깨우려고 부단히 애를 쓴다. 그래서 깨웠는가?

이젠 복수심이 자신의 성격이 되어버렸다는 오대수의 고백만 듣는다면, 오대수도 괴물의 대열에 동참한 것처럼 보인다. 정말 그런가? 아니다. 괴물-이우진은 오대수를 단지 ‘짐승보다 못한 놈’으로만 만들었을 뿐이다. 그게 다다. 적의 적은 친구일거라는 아주 상식적인 믿음마저 여지없이 깨져버린 상황에서도 오대수는 괴물이 되지 못했다.

<JSA>에서는 괴물로 변한 이수혁 병장(이병헌)이 다시 남성식 일병(김태우)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올드 보이>에서 그런 일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오대수는 복수의 날만을 기다린 ‘짐승만도 못한 놈’으로 끝까지 남았다. “너희 둘은 알면서도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괴물-이우진의 마지막 질문이 오대수의 귀에 들어와 박히지 않고, 그저 허공을 공허히 맴도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결국 이우진으로부터 튀어나온 괴물은 쩌렁쩌렁하게 포효하며 여기저기 들쑤셔는 놓았지만, 그걸로 끝이다. 그는 또 다른 괴물새끼 한 마리 복제하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그럼 마지막에 오대수가 떠나보낸 ‘괴물-오대수’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사실 그건 괴물이 아니었다. 단지 그건 괴물-이우진에게 지독히 시달린 오대수의 “현실”일 뿐이다. 스위스의 심리분석학자 칼 융(Carl Gustav Jung)의 말대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오대수는 자신의 현실, 즉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망각함으로써 살 권리를 되찾은 거다. 이런 결말 또한 <JSA>에서 이수혁 병장과 남성식 일병이 각자 자신의 현실을 끝까지 품어 안음으로써 살 권리를 포기했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라 하겠다.

시종일관 망각의 동굴 속이 아니면 살 수 없는 동물 - ‘망물’(忘物). 바로 이것이 내가 본 인간 오대수다. 하기사 누구 말대로, 최대의 복수는 칼날이 아니라 망각일 수도 있겠지만, 어째 엔딩이 좀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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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verqoo
보고 싶어지네요
  
2008-01-07 00:0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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