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도 우도 모르는 동막골
[동막골]은 이념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있다.
순수와 평화의 이상향인 동막골의 환타지를 통해 이념의 굴레 속에 아직도 갇혀있는 우리의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분단 당시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인민군이 되고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군이 된 가공할 이념의 덫이 얼마나 잘못된 허위인가를 이 영화는 고발하고 있다.
주어진 환경이 씌워준 이념은 다른 환경에서는 한갓 무기력한 허상임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좌(左)가 무엇이며 우(右)가 무엇인지 모르는 동막골에서 이념은 살아남을 공간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념이 산 아래 세상 마을에서는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절대권력으로 살벌하기 그지없던 1950년 9월이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다. 그러나 같은 시대 동막골에서 이념은 더 이상 권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동막골이 이념적 무균지대가 아니라 산 아래 보통사람들의 마을이었다면 어떠했을까. 어느 날 들이닥친 한국군과 인민군은 동네의 좌우대립을 극대화 시켰을 것이고 그들 모두는 결국 이념대립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동막골은 이들에게 덧 씌워진 이념의 굴레를 아우르고 그들을 오염시킨 이념을 용해해버린다.
총을 작대기로 아는 동막골 사람들, “손들엇”도 모르는 동막골의 순수 속에서 이념은 전혀 생뚱했고 용납되지도 않았다. “손들엇”했는데 “왼손 드나, 오른손 드나”하고 나오면 “손들엇”의 위엄은 무력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동시에 이념이 얼마나 집요한 것인지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한국군과 인민군들은 이 영화의 크라이맥스인 마지막 부분 직전까지도 서로간 불신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한국군 장교가 수류탄을 덮쳐 모두의 피해를 막아주고 멧돼지의 위험을 함께 극복했으면서도 그들은 흔쾌히 형제로 돌아가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한국군과 인민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동막골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미군 전폭기의 폭격지점을 다른 곳으로 유도한다. 그래서 그들은 동막골의 평화를 살리고 끝내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동막골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도록 한 것일까. 그것은 이념이 동막골의 순수와 평화에 동화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미군 조종사 스미스 대위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사는 마을, 동막골을 구하기 위해, 부대에 귀환해 동막골의 진실을 알림으로써 마지막 폭격으로부터 마을을 살려낸다.
이렇게 해서 이 영화는 이념의 벽을 뛰어넘는 방법도 암시하고 있다. 이 영화가 성공한 또 하나의 이유는 환타지 기법을 통해 치열한 이념갈등을 서정으로 담아낸 데 있지 않나 생각된다.
수류탄이 옥수수 창고에서 터져 온 마을에 평화의 팝콘비를 뿌리게 하는 환상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 큰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은 ‘동막골’을 보기위해 극장앞에 길게 늘어선 관객들이다.
아직도 이념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 현실에서 ‘동막골’은 우리들 속에 잠자고 있던 하나의 희망을 일깨워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 희망을 찾아 ‘동막골’로 ‘동막골’로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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