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의 주인공 상우는 허진호의 전작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과 닮아 있었다. 상우는 일시적인 소리를 담아 영원한 기록으로 남기는 믹싱 엔지니어, 정원은 일시적인 순간을 영구적인 기록으로 담는 사진사이다. 그런데, <외출>의 인수는 공연 조명감독이다. 콘서트의 조명을 담당하는 인수는, 콘서트가 진행되는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두세 시간이 지나 공연이 끝나면 허무감을 느끼는 인물이다. 순간을 영원으로 바꾸지 않고 순간의 손을 놓지 않는 인수는, 그래서 전작의 남성 캐릭터들과 다르다. 이것은 인수의 사랑이 정원의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랑'이나 상우의 '변하지 않는 사랑'과는 어디가 달라도 다를 것임을 암시하며, 더불어 허진호의 세 번째 장편영화 <외출>은 적어도 <8월>에서 <봄날>로 이어지는 '허진호 멜로'의 직선도로를 '벗어날 수도' 있음을 예상케 한다.
그런데 <외출>의 사랑은 파격적이다. 우선 그것이 불륜이 낳은 불륜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둘째로 누구보다 담백하고 물기없는 사랑을 이야기한 허진호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 파격성만큼이나 영화도 허진호의 포뮬러를 벗어난다. 허진호의 스타일은 화분을 선물하고 하드를 사먹는 여자와 남자가 벤치의 끝에 앉은 신 같은 단편적인 메모리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전의 허진호가 산책을 하고 있었다면, <외출>의 허진호는 멀리뛰기를 하고 있다. 이전보다 더욱 넓어졌다고 느낄 수 밖에 없는 행간은, 미처 그 행간을 읽어내지 못한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 허진호는 확실히 이전과 '좀 다른' 이야기를 '좀 다른' 방법으로 말하고 있다.
<외출>에서 돋보이는 것은 점프 컷이다. 전화벨 소리와 밤길을 지나 단 두 번의 장면 전환을 통해 인수와 서영은 첫만남을 이룬다. 장면과 장면이 연속되지 않는 (그로서는) 생경한 연출기법을 통해 허진호는 영화적 외출을 꿈꾸는 모양이다. 그러나 <외출>에서 점프 컷은 외적 표현방법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감정의 점프 컷, 플롯의 점프 컷이다. 인수와 서영은 여느 커플처럼 그 감정이 완만한 포물선을 이루지 않는다. 마치 막대그래프처럼 띄엄띄엄 급격하게 솟아오르는 이들의 감정과 사랑은, 관객에게 그 행간에 담긴 복잡한 사고의 구조를 읽어내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것이 본래의 허진호 영화의 과제였으며, <외출>에서는 좀 더 심화된 단계에서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불행하게도 <외출>의 관객평은 '재미없다'가 비교적 다수인데, 이 '재미없음'은 아무래도 '불편함'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불편함이야말로 허진호의 행간을 읽어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이며, 다소 심화된 이번 문제는 정답률이 낮을 뿐이다. 그래서 <외출>은, 허진호의 영화적 외출로 읽히기 쉬우나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다. 허진호는 제자리에서 단지 각도를 틀어서 이야기하고 있었을 뿐 본질은 같은 것이다.
제작 당시부터 화제가 되었던 <외출>의 베드 신은, 정작 뚜껑을 열고 나니 그것의 연출 방법보다는 그 신이 등장하는 시점에 있어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혹자는 편집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제기할 수 있을 정도로 뜬금없이 등장하는 <외출>의 베드 신은, 차별성을 가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일반적인 멜로의 공식이 하나의 교각일 때, 허진호의 멜로는 행간의 독특함으로 인해 징검다리에 비견될 수 있었다. 징검다리는 분명 띄엄띄엄 놓여 있지만 건너는 사람이 그 사이를 뛰어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소극적인 인터랙티브 멜로를 구축한 허진호에 있어서도 이 베드 신은 의미가 다르다. 기존의 영화에서는 중간중간 분리된 포물선을 관객의 능력으로 메워 영화에 의문을 남기지 않았다면, <외출>은 그 베드 신 하나만으로 "이들은 자고 나서 사랑했을까, 사랑하고 나서 잤을까"라는 의문을 남기게 한다. 그것만은 그 누구라도 추측하는 것 이상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질문이다.
<외출>은 상당히 잔인한 영화다. 경호와 수진의 사랑은 세간에서 말하는 '더러운' 사랑이다. 그들의 사고 현장에서 수습된 소지품엔 콘돔이 포함되어 있었고, 디지털 카메라에 담긴 동영상을 본 서영은 욕설을 뇌까리고, 인수는 구토를 한다. 다분히 의도적인 이 장면은, 서영과 인수의 이런 노골적인 반응이 과연 '자신들에게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기능을 한다. 이는 <올드보이>의 역지사지의 질문, "나는 다 알고 사랑했어, 너희는 어떨까"와 같은 질문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 대해 허진호가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이 있다. 영화 전반에 걸쳐 이 네 사람의 가족은 수진의 아버지 이외에는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명령으로 선을 보고 결혼한 서영의 부모도, 경호나 인수의 부모도 등장하지 않는다. 수진의 아버지라고 해서 별다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타의적으로 극을 흔들어 놓는 역할을 하는 유일한 장면은 서영이 화장실에 숨는 장면이다. 의도적인 가족 배제를 통해 허진호는 영화에서 통속성을 걷어내고 윤리적 잣대를 들어냈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엔 설득력이 부족할 수는 있지만 추하거나 난잡하지 않다. 허진호는 다소간의 리얼리티를 포기하는 대신 아름다움을 택했다.
수진의 아버지가 인수의 모텔방을 찾아오는 순간 방에 있던 서영은 화장실로 숨는다. 인수는 저녁을 먹자며 수진 아버지를 데리고 나간다. 그 순간 화장실에 있는 서영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심정을 느끼는 여자이다. 그러나 인수가 다시 돌아와서 서영을 꽉 껴안아 줄 때 서영은 누구보다 아름다운 여자다. 허진호의 미학에 반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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