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때론 만화책의 흑백같은 느낌 이다가, 때론 색감이 잔뜩 화려한 유화같고, 해학을 가득 담은 민화같기도 하다가, 또 마음을 비우라는 듯 여백을 살려주는 수묵화같기도 하고. 꼭 여러 점의 그림을 앞에 두고 한꺼번에 감상하는
시각적인 즐거움이 가득한 영화였다.
한 마리의 외로운 검은 학을 보는듯 했던 강동원의 춤사위와 설레이는 듯, 탐색하는 듯했던 담장 아래에서의 첫 대결. 춤을 추듯, 서로에 대한 애틋함을 담았던 강동원과 하지원의 대결 장면.
대면이 거듭될수록 짙어지는 서로의 마음은 스치는 칼날에 고스란히 담겨지고, 배경은 반대로 점점 간결해지면서 마지막에 가선, 흩날리는 하얀 점으로 마무리된다.
흩날리는 눈발이나 중간중간 여백을 채워주던 빠알간 단풍잎들. 오색 찬란한 천들도 이따금씩 날려주고. 빛과 어두움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매 장면마다 강약의 대비를 보여주다, 가끔씩 그림자처리로 보는 사람에게 호기심을 일으키기도 하고. 시각적 유희를 예술로 한층 끌어올려주는 감독의 내공이란!
한데 모아놓은 걸쭉한 삼도 사투리, 친구의 말처럼 판소리의 추임새 같았던 장터 안 다양한 소리들, 거기에 더해진 안포교와 남순이의 맛깔스러운 입담들.
설레는 듯, 낙엽을 밟는 남순의 발소리가 어느 순간 2개가 되면서 이내 들려오는 나즈막한 목소리. '내가 좋아서 따라오는거요?' 내 귀가 떨리고, 내 귀가 즐겁다.
마주앉은 남순과 슬픈눈의 주위로 조심스레 흐르던, 서로의 마음을 넌지시 비쳐주던 물소리.
또한 슬픈 눈이 밟는, 뽀드득 거리던 눈소리는 어쩌면 그리도 고독하고, 애처로운지.
거기에 적재 적소에서 나와서 절묘하게 어우러진 다양한 음악들. 클래식에서부터 해금연주, rock버전과 발라드버전의 요즘 음악들까지. 인물들의 행동과 음악 속의 박자의 어우러짐에 눈과 귀가 하나가 된듯 했다. 인정사정 볼것없다 보다도 훠얼씬 감각적이다.
팬서비스차원에서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때 흘러나오는, 하지원과 강동원의 듀엣도 너무 좋았고.
어찌보면, 감각적으로는 참으로 즐거운 영화다.
시각,청각, 그리고 다양한 장소들이 선사하는 공간감까지..
감각이란 감각은 총망라되기에.
하지만 감성적으로는 첫사랑의 알싸한 그리움이 남는 슬픈 영화였다. 가슴이 시린, 아픈 꿈을 꾸고 난 느낌이랄까.
모든 것이 너무나 아름다웠기에 더욱 슬픈 판타지. 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명세가 미학적인 모든 것을 걸었던 "슬픈눈"은, 남자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구나! 싶었기에, 지독한 슬픈 느낌을 머금고 있었나보다.
영상과 음악이.. 단순히 보고 듣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
보면 볼수록, 아련히 그립고, 또 보고 싶어지는..
'사랑'의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일지도. 어쩌면, 이것이 ''형사''를 만든 이명세의 궁극적인 의도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덧붙이자면,
내러티브 부족이라는 평은,
이명세 영화에는 해당 사항이 없는, 근거없는 비난일 뿐이다.
이명세는 애초에 내러티브엔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는 오로지 감각과 감성으로 말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영화라는게 내러티브 하나만으로 정의되는건 아니지 않은가?
이 세상의 모든 예술이 단 하나의 정의로 귀결될 수 있었다면,
애초에 예술 이라는 것 자체가 형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술은 창작이고, 창작은 상상력이고,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이명세를 존중한다.
이명세를 존경한다.
한국 영화사에 '아름다움'을 선사한 당신,
정말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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