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이랑 데이트하느라 개봉하는 영화는 취향 상관없이 보아치우는 연인들을 제외하고 나 같은 기분파에다 영화 한 편에 부담스럽게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은 극장에 갈 때 자신이 선택한 영화에 기대하는 바가 따로 있다.
언제 그런 영화가 개봉했는지도 감쪽같이 잊혀진 [로얄 테넘바움]이 극장에 걸렸을 때 인생이 지루했던 나는 알록달록한데 왠지 시니컬하게 웃긴 영화 포스터를 보고 그 걸음에 극장에 들어가 모르는 언니 한 분과 단둘이 앞뒤로 앉아 오붓이 영화를 보았다. 싫어하는 배우가 나옴에도 나를 극장 의자에 앉힌 [로드무비]의 힘은 상당히 리얼하다는 동성간의 섹스 묘사에 그 버닝 포인트가 있었고, 소문을 듣고 나를 극장으로 이끈 [올드보이]에게 원한 것은 ‘스타일’이었다.
이런 선택들은 모두 영화의 사전 지식 별로 없이 영화를 실제로 보기 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느꼈던 감정이나 평가와는 완전히 별개인 것이다.
이번에 내가 [남극일기]에 기대했던 것은 ‘진지함’이었다. 영화를 보기 며칠 전 라디오에서 한 기자가 나와 이 영화에 유머가 부족해서 아쉬웠다는 말을 하는 걸 듣는 순간 나는 이 영화를 보겠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지금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에는 유머같은 건 하나도 필요 없었다.
*완전무장한 사람들*
여기, 사람들이 걸어간다. 그냥 걷는 사람들이 아니다. 온통 흰 눈밖에 없는 얼음덩이 위를 완전무장을 하고 자기 몸무게만한 짐을 끌고 걸어간다. 어디로 가는 걸까. 목적이 있든 없든 그들은 타인의 숨결 한웅큼도 파고들 수 없는 완전무장 상태. 견뎌내야 할 건, 일으켜 세워야 할 건 자기 자신밖에 없으면서도 자꾸만 숨이 차오르고 눈앞의 흰색이 버거운 걸 왜일까.
*도달불능점*
알고 보니 그들이 가는 곳은 남극 도달불능점. 나는 한평생을 살아도 절대 가보려고 생각지 않는, 명칭만 들어도 숨이 차오는 그런 곳. 나라면 가지 않는다. 27년을 살아오면서 힘들고 어렵고 하기 싫은 일은 할 수 있는 한 피해왔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 인간이 이 영화를 보고 있자니 이건 완전히 어불성설이다. 도달불능점? 애초에 그런 곳은 나에게 존재치 않는다.
*세 개의 태양과 세 개의 그림자*
어? 이게 뭐야? 흰 눈 위에 검은 그림자가 세 개. 하늘을 보니 태양이 세 개다. 그 사이를 흐르는 고요를 뭐라 이름붙이면 좋을까. 공포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하고 일상이라 하기엔 너무 기묘한. 그 간극은 바로 현재 우리가 회사를 다니고 학교를 다니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이곳과 남극의 차이.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이 남극에서는 현실이 된다.
*화이트아웃*
내가 어디를 걷고 있는지. 땅을 밟으며 걷는지 하늘을 밟으며 걷는지 구분할 수 없는 이 하얀색. 머릿속까지 하얘지는 이 하얀색에 때로는 중독된다. 중독이 아니라 그것과 나를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아득해지는 정신속에서는 더 이상 나를 괴롭히던 생각들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계속되는 낮과 미래에 계속될 밤*
낮이 계속되고 있다. 마치 내가 원한 것처럼. 어둠을 보고 싶지 않다. 내 마음의 어둠이 너무 꺼멓다. 벅차다. 어떤 때는 걷다가 얼음덩이가 갈라지고 그 깊고 깊은 공동으로 나를 내동댕이쳤으면 하고 바랄 때도 있다. 동료가 매달려 있던 끈을 놓아버린 대장의 마음이 무겁게 나를 짓누른다. 썩어 들어가는 동료의 발을 톱으로 자르던 대장의 커다란 어깨가 너무 무서워서 나는 잠시 눈을 감는다. 아마도 이제는 계속되는 밤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보지 않아도 되는. 항상 현실을 외면해 왔던 나에게 딱 어울리는 그만큼의 어둠.
*왜 나는 거기에 가는가*
다시 원점이다. 거기. 이제는 거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나는 도대체 어디로......?
인상적인 대사가 많은 영화였다. 영화 내내 가볍지 않은 무게로 가슴에 턱턱 내려앉는 말들이 나를 자꾸만 생각에 빠져들게 했다.
“니들은 왜 나를 못믿지.”
송강호가 힘들게 내뱉은 이 한마디가 영화관에 슬프게 울릴 때 나는 정말 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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