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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마냥 웃기는 영화가 그리울 때 구세주
jimmani 2006-02-14 오전 1:00:55 737   [2]

언제부턴가 우리나라 코미디 영화에서는 하나의 규칙이 생겨버렸다. 언제 어느 영화가 맨처음 시도했는지는 어느새 잊어버렸지만, 지금 나오는 대다수의 한국 코미디 영화들은 "선코믹 후감동" 체제를 충실히 따라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헐리웃 코미디들도 뒤에 가서 뭔가 찡한 구석을 남기긴 하지만, 한국 코미디 영화들은 유독 뒤로 갈수록 앞서 웃긴 것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어버리며 작정하고 울리려는 모습을 많이 보인다. 처음에는 "어, 이거 웃기기만 한 줄 알았더니 감동도 꽤 있는데"하면서 의외의 모습에 놀라다가도 이제는 "또 감동모드냐"하면서 식상해진 게 사실이다. 그래서 요즘 들어서는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쭉, 곧이곧대로 웃기는 영화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 <주유소 습격사건>이나 <신라의 달밤> 등의 경우처럼, 오히려 끝으로 갈 수록 난장판이 되어 더 큰 웃음판을 펼치는 영화들 말이다.

이 영화 <구세주>는 모처럼, 곧이곧대로 "막" 웃기는 영화다. 물론 중간에 가족애, 일편단심 사랑으로부터 감동을 자아내긴 하지만 그것도 그저 잠시, 영화는 또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이 관객의 배꼽을 사냥하러 전력질주한다. 절대로 웰메이드가 아니고, 이야기 구성에서도 작위적이고 비현실적인 것들 투성이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삼천포로 빠지지 않고 그저 마냥 웃기는 영화를 만난 것이 꽤 반갑다.

우리의 주인공 정환(최성국)은 아버지가 예전에 조직생활로 돈을 모으고, 지금은 어머니가 의상실로 돈을 벌고 있는지라 집안은 부자지만 성격은 한마디로 "막돼먹은" 인간이다. 그저 돈 쓸 궁리, 여자 꼬실 궁리 밖에 머리 속에 들어차 있지 않은 사람이 이 사람이다. 대학생 시절, 연극영화과에 다니는 그가 친구들과 엠티를 가는데 그곳에서 법학과 여대생들을 만나게 되고, 정환은 또 다시 어떤 여자를 넘어오게 할까 궁리하는 데 바쁘다. 그 곳에 정말 이성이 간절한 여인이 있었으니 법대생이라 두뇌는 명석하나 공식적으로 폭탄취급을 받는 여인 은주(신이). 그는 이번에는 제발 폭탄신세에서 벗어나보자는 의미에서 대놓고 물에 빠지는 연기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진짜 물에 빠지게 되어 허우적거리는데, 그런 은주의 구세주가 나타났으니 바로 정환. 이후 은주는 자신을 구해준 은인, 유일한 남자라는 생각에 정환에 대한 일편단심을 굳히게 된다. 몇년 뒤, 군대에 있는 정환을 은주가 면회 오는데, 정환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는 은주는 정환과 하룻밤을 보낼(정환은 의도하든 말든) 모종의 계획을 세우고, 정환은 술김에 그 계획에 바로 넘어오고 만다. 그 후로 2년 뒤, 열심히 공부하여 검사가 된 은주는 과거의 실수로 낳게 된 쌍둥이를 데리고 다짜고짜 정환의 집으로 향하고, 결국 은주의 막무가내 계획으로 인해 정환과 은주는 부부가 된다. 그러나 정환의 성격은 여전히 망나니 이미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으니, 은주는 이에 분개해 남편의 버릇을 싹 다 갈아치울 계획을 세우는데.

소재도 그닥 참신하지 않고, 전개는 더더욱 참신하지 않다. 한 남자만 일편단심 바라보는 여자가 그 남자와 하룻밤을 보낼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의 결과로 나온 쌍둥이를 담보로 남자를 몰아붙이는 등의 설정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극단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은주가 어쩌다가 정환에게 그러한 절실한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됐고, 정환은 어쩌다가 어느새 그런 은주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지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채 그저 후다닥 넘어가기에 바쁘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애교로 봐줄 수 있다. 어차피 이 영화는 제작진도 말하듯 그저 웃기기 위해 나온 영화이고, 이런 고리타분하고 극단적인 설정이라도, 배우들이 제대로 웃겨주기만 한다면 코미디 영화로서 별 흠잡을 구석은 많지 않은 영화가 될 것이다. 이런 설정에 배우들이 제대로 웃겨주지도 못한다면 제대로 최악인 영화가 되겠지만.

그런 점에서, 영화가 홍보 과정에서 "웃긴 배우들은 다 모였다"고 호언장담한 것은 그만큼 효과를 본 듯 싶다. 한마디로 이 영화, 제대로 웃긴다.(물론 간간이 화장실 유머들이 나오면서 위험수위를 좀 왔다갔다 했던 부분은 살짝 눈살이 찌푸려지기는 했다) 중후반부에 가서 은주의 일편단심 사랑이 드러나는 부분에서 꽤 감동을 자아낼 만하지만 이게 끝까지 가지 않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코믹 모드로 돌입하며, 이전보다 더 웃을 준비를 하라는 신호를 쏘아올린다.

이 영화가 이렇게 웃길 수 있었던 이유는 십중팔구 배우들의 힘이다. 주연으로서의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던 최성국과 신이는 걱정 붙들어 매라는 듯 두 사람의 찰떡 호흡을 맘껏 과시한다. 최성국은 예의 자뻑남 이미지, 진지한 표정과 오버모드를 극단적으로 오가는 스타일을 고수하며 관객의 웃음보를 끊임없이 자극한다. 신이는 검사 역할이라 그런지 이전 영화들에서보다는 좀 덜 웃긴 모습을 보여줬지만, 그래도 중간중간 걸쭉한 사투리와 능청스런 분장, 댄스 등으로 역시나 통쾌한 웃음을 주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꽤 의외였던 건, 이 두 배우들로부터 멜로스러운 감정이 어느새 이입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고편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신이가 꾸역꾸역 미역국을 먹고 최성국은 눈물을 닦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들만 봤을 때에는 코믹배우들의 코믹스러운 멜로 연기라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사실 편집도 그런 분위기가 은근히 나게 했고;;) 그런데 막상 영화를 통해 그 장면들을 보니, 정말 가슴이 꽤 짠해졌다. 신이가 미역국을 먹는 장면은 여느 멜로처럼 예쁘장하게 치장한 건 아니지만 왠지 그 서러움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느낌을 받았고, 최성국의 눈물 연기 역시 극중 정환이가 이제 제대로 개과천선하는 구나 싶어 뿌듯한 느낌이 절로 들었다. 역시 코믹 연기를 잘 하는 배우들은 다른 연기도 다 잘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코믹 연기 잘 하는 배우들 치고 연기력 부실한 배우들이 있었던가. 여담이지만, 최성국이야 지금은 코미디 배우로 확실히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어도 원래는 멜로 연기자 출신이기는 했지만 말이다.(10여년 전 "멜로연기의 차세대주자"라면서 신문에 난 그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의외로 웃음보를 맘껏 자극하는 배우들은 따로 있다. 그 중 한 명이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그 진가를 거의 알지 못했던 배우, 정환의 죽마고우로 정환과는 반대로 성격이 지나치게 좋은 칠구 역의 조상기다. 작년 국민드라마의 반열에 오른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언급되며 검색어 순위 1위까지 오르기도 했지만 개봉 당시 우렁차게 망한 영화 <미지왕>의 주인공으로 나왔던 배우다.(당시 신문광고와 길거리 포스터에 나왔던 그의 공격적인 얼굴이 아직도 떠오른다.) 그 이후 브라운관에서 모습을 보이다 10년 만에 비로소 다시 비중있는 배역으로 스크린에 진출한 게 이 작품인데, 왜 이제서야 기지개를 펴셨나 싶다. 정말 그의 능청스러운 코믹 연기는 영화에서 웃음을 선사하는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칠구란 배역 자체가 한편으로 좀 오버스럽고 특이하긴 하지만, 그의 괴짜스러운 연기가 없었다면 그러한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을 듯 싶다. 운동에 잔뜩 필이 꽂혀 시도 때도 없이 무술시범을 보이기도 하고, 때론 친구의 명령에 아낌없이 맞아주고, 상황을 더 걷잡을 수 없이 악화시켜놓고는 그저 "미안해 정환아~"만 연발하는 그 모습은 너무나 순진하고 곧이곧대로여서 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웃음이 터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미 코미디 배우로서의 내공이 상당한 최성국과 함께 콤비플레이를 해도 전혀 뒤쳐지지 않고, 어떨 땐 최성국보다 더 두드러지는 코믹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번 영화를 통해 확실히 코미디의 재능을 꽃피우셨으니 이제는 활발한 활동으로 다시금 우리를 즐겁게 해주시길.

이외에도 개성넘치는 조연들과 카메오 출연진들도 웃음보를 한껏 자극해주었다. 역시나 코미디 내공이 장난이 아니신 백일섭 씨는 전직 조직출신으로서 가끔 끓어오르는 성미를 주체못하시고 들고 있는 물건으로 아낌없이 원반던지기 시범을 보여주시는 활달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웃음을 주었는데, 후반부에 가서는 클라이막스 결투신에 나타나서는 뭔가 보여줄 듯 하다가 동생이자 정환의 삼촌(이원종)을 시켜서 "쟤쟤~"거리면서 수동적인 네비게이션 공격을 보여줘 또 웃음을 선사해주었다. 카메오라고 하기엔 좀 배역의 중요도가 크고, 조연이라고 하기에는 또 비중이 좀 작은 은주 유모 역의 김수미 씨는, 이제 코미디 영화에 있어서 존재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포스를 발산하는 코미디 대모가 되셨다. 이번 영화에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이번엔 음산한 분위기가 잔뜩 풍기는 표정으로 수시로 정환에게 뭐씹은 표정으로 저주멘트+저주모션을 날리고, 그러다가 은주의 옆에서 주책맞게 통곡을 하기도 하는,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유모 역할을 보여줘 웃음보를 또 한가득 채워주었다. 비단 본편 뿐 아니라, 엔딩 크레딧 올라가고 난 뒤에도 이 분이 제대로 웃음보를 찔러주시니 절대 방심하지 마시길. 이처럼 이 영화에서는 주연배우들 뿐 아니라, 조연, 카메오들까지 코믹 연기를 제대로 보여주며 관객의 웃음보를 잡고서는 놓지를 않았다.

영화는 후반부에 가서 은주의 변함없는 남편사랑, 자식사랑을 보여주며 감동코드를 살짝 자극하고, 가족애를 은근슬쩍 강조하긴 하지만, 영화를 본 사람으로써 이 영화를 통해 건질 수 있는 주된 요소가 이 가족애로 인한 감동은 아닌 것 같다. 일종의 양념이라고나 할까. 살짝 감동 주다가도 어느새 다시 코믹 모드로 돌아가듯, 이 영화가 노린 것은 관객을 끊임없이 웃게 하는 것이고 그런 전략에 영화를 보는 사람으로서 어김없이 말려들었다.

화려한 특수효과도 전혀 없고, 아름다운 영상미도 거의 없고, 세련된 스타일같은 것도 찾아 볼 수 없이 지극히 고리타분하고 촌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영화지만, 그 우직한 마음으로 관객을 끝까지 "막" 웃겨보려는 욕심이 있어 마음에 드는 영화였다. 나 역시 그런 욕심에 두말할 나위 없이 그만 무릎을 꿇고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고. 그저 관객을 웃겨보려고 만들었다는데, 뭐 남는 게 없고 감동도 없다고 욕할 필요는 굳이 없다. 그저 영화 보는 내내 많이 웃었다면 코믹 영화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니까. 나는 뭐 입이 아플 정도로 웃었으니까. 중간에 살짝 위험스럽다 싶은 부분이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비위를 건드리면서까지 웃긴다거나 하는 부분도 크게 없었고. 뭔가 감동을 남기고, 메시지까지 남기려고 욕심을 부리지 않고 그저 웃기는 데만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 이 정도로 웃겼다면 코미디 영화로서는 꽤 만족스러운 영화가 아닐까 싶다. 가끔은 다른 데 한눈 팔지 않고 그저 "웃기려고만" 하는 영화도 만들어야 한다(물론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가면서).

사족 : 저녁인데다가 부산에서 하는 시사회였는데 깜짝 무대인사로 주연배우 최성국이 극장을 찾아왔다. 예의 그 능글맞은 눈빛과 포즈, 말투로 "공짜로 영화 많이들 보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데, 왜 괜히 찔리는 것인가. 정정당당하게 시사회 티켓을 거머쥐고 왔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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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주(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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