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가 900만 관객을 돌파하고 이제 천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니 한국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으로
서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를 너무 재밌게 본 터라 모두들 감동의 도가니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으리라 믿었건만, 팔백만 중 300만은 ‘생각보다 별로다.’ 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 같고 그 중의 백만
은 ‘재미없다.’ 는 평가를 내리고 있으니,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물론 모든 관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영화는 없겠지만 ‘실미도’ 나 ‘태극기 휘날리며’ , ‘웰컴 투 동막골’ 같
은 소위 국민 영화라 불리는 영화에 비해 재미없었다는 반응이 많으며, 동시에 대중적 영화로는 드물게
‘왕남폐인’ 이라 불리는 수많은 매니아를 낳은 <왕의 남자>. 이것을 매력이라고 해야 하나, 한계라고 해야
하나 단어 선택에도 갈등이 많다.
수동적 공길, 시점의 한계

영화의 원작 <이>는 공길과 연산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것을 영화로 각색하면서 주인공은 장생으로 바
뀌었고, 이것은 영화의 치명적 약점이 되고야 말았다. 공길과 연산의 이야기이면서도 장생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로 따지자면 ‘3인칭 관찰자 시점’이 되어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수동적인 인물이었던 공길이 연산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끼면서 ‘궁을 나가지 않겠다.’ 라고 말
하는 능동적 인물이 되어가는 과정이 장생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점의 한계로 인해 강하게 부각되지 못했
다. 공길은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수동적이고 평면적인 캐릭터로 일관하는 것이다.
장생의 비중을 늘린 것은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고 했던 감독의 욕심이 아니었을까. 말하려는 것은 분명
한데 시점, 즉 표현이 애매해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관객들이 많다. 장생이 주인공이 아니었더라면, ‘전
지적 작가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더라면 더 많은 관객들이 감독의 의도를 파악하고 공감하지 않았
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공길의 재해석, 존재의 한계

공길은 현실적이지 않은 캐릭터다. 완전한 남성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섬세하고 감성이 풍부한 여성의
특징을 지니며, 평소엔 ‘쑥맥’이다가도 탈만 쓰면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은 요부로 돌변한다. 존재의 경계
가 무너진 존재. 형태를 갖췄다기보다는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존재. 공길은 ‘자유’를 상징한다.
장생은 공길을, 즉 ‘자유’ 를 함께하며 지켜주려 했고 연산은 소유하려 했다. 바로 이것이 장생과 연산의
가장 큰 차이점이며, 장생이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이다. 하지만 공길의 의미는 너무나 모호
하게 표현되어 있다. 위에서 말했 듯 장생이 이야기를 주도하기 때문에 공길의 존재는 한계를 가질 수밖
에 없다. 비극의 시발점이 되지만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엔딩이 쌩뚱 맞았던 이유, 연출의 한계

너무나 갑작스러웠던 중종반정. 갑작스럽게 찾아온 엔딩은 벌려놓고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신나다가
말아버린 찜찜한 느낌을 남긴다. 영화 중반부터 중종반정을 준비하는 중신들의 모습을 보여 줬다면 사람
들 말마따나 ‘쌩뚱맞은’ 엔딩씬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배우들의 연기력에 비해 연출력
이 아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대략 이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많다면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에 낮은 점수를 준 것이 아닐까 생각 된다. 문
제는 이 세 가지 한계가 영화적 재미만이 아니라 영화의 완성도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왕의
남자가 평론가들에게 후한 점수를 받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랴. 사람들이 모호함이라 부르는 그것에서 나는 나름대로 해석해보는 즐
거움을 맛봤고 쌩뚱 맞았다는 엔딩에서는 진한 여운을 느꼈으며, 자유로운 광대패들의 삶에서는 답답한
현실을 날려버릴 만큼의 통쾌한 대리만족을 느낀 것을. 영화의 한계가 내게는 모두 매력이었고, 아쉬움
은 여운이 되었다. 치밀한 구성도 극적 반전도 없는 거칠고 투박한 영화였지만 오랜만에 사람냄새 나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낀 영화 <왕의남자>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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