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31.14 브로드웨이 시사회
<주>이 글에는 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내용을 알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읽는 것을 자제해 주실것을 부탁드립니다.
이제 대한민국의 학창시절이란 즐거운 추억보다는 악몽의 기억에 가까운가보다. 사회인이 되기 전, 최초로 어떤 일정 집단에 소속되어 사회화를 시작하는 집단으로써, 학교의 역할은 크다. 그러나 지금의 학교란 약육강식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법을 배워야하는 고통의 과정이 되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비추는 거울이라 했다. 어쩌면 이기주의와 권력화, 편협함으로 치닫아가는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 학교인지도 모르겠다.
한때 '왕따 비디오'가 실존하지만 모르는척 덮어온 학교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드러낸 이후, '왕따'라는 소재는 다양한 매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충격의 파장은 그닥 오래가지 못했다. 그때 분노했던 사람들은 어느새 익숙해져, 학교를 다룬 영상물이나 소설속에 왕따 학생 한두명쯤 등장하는 것은 그냥 당연한 배경이 되었다. 이전에 개봉된 <6월의 일기>가 그닥 큰 파장을 일으키지 못한것에는, 영화 자체의 완성도나 설정의 문제도 있었지만, 그 소재가 더이상 충격적이지 못하다는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영화는 다시 한번, '왕따 학생'을 비춘다. 그러나 이 주인공은 기존의 아이들처럼 우울하거나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자신이 왜 왕따를 당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로,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을 바꾸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초반의 코믹적인 코드를 담당한다. 그러나 영화 초반의 약간은 긴장한 듯한 영화를 바라보며, 그닥 유쾌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화면 아래에 뜨는 시간 표시는 <24>를 연상시키고,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여자친구를 보며 떠올리는 환상은 <앨리 맥빌>시리즈를 떠올리게 한다. 오히려 영화가 진행되면서 중반 이후에 등장하는 자연스러운 상황들이 더 코믹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한단계 나아갔음을 느끼는 것은 '남궁달'(봉태규)이 꽤나 강한 싸움꾼으로 오해받으면서 가해자의 입장에 서게 되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정서에 익숙했던 그가, 어느 순간 가해자의 입장에 서게된다. 학교 내에서 강한 아이들이 군림하고 약한 아이들이 순종하는 것은 어느새 당연스런 계급화로 자리잡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그 '당연함'과 '양심'사이에서 갈등하게 되는것은 다만 학교에서만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남궁달'은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사회생활을 하고 직장에 소속되면서 같은 갈등을 맞딱드리게 될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잘못되었지만 당연시 여겨지는 어떠한 룰에 대한 갈등은 평생 인간을 따라다닌다.
그가 자신의 양심을 따르는 선택을 하고, 여러가지 우연에 의해서 승리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소망하는 해피앤딩이다. 필자의 과거를 잠시 떠올린다. 고등학교시절, 아직은 왕따라는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던 시절도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히 그러한 현상은 알게 모르게 존재했었다. 그 당시 필자와 어울리던 친구들은 한 친구를 대상으로 삼아 꽤나 괴롭혀댔었다. 사실 양심에 꺼려지는 것은 사실었으나, 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과 굳이 아니라고 나서서 내가 피해를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침묵했었다. 그러나 이제 학교를 졸업한지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가끔 그때를 떠올리면 양심이 욱신거린다. 그리고 그때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무시했던 기억은 지금 강박적으로 옳지 않다고 느끼는 것에 반발하는 내 가치관을 형성했다. 그때 침묵했던 내 자신이 가장 비겁했다고 느끼고, 후회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어느쪽은 선택하는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그 선택이 모여서 사회의 선택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고 침묵한다면, 우리 이후의 아이들에게도 옳은 것을 선택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먼저 사회적인 소수자들과 약자들에게 손을 내밀어, 양심의 소리를 실천할때, 아이들 역시 양심의 소리를 들을 것이다. 결국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자신이며, 해결 또한 자신의 문제이다.
written by suyeun www.cyworld.com/nightflightc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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