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당연하리라고 여겼던 '브로크백 마운틴'의 작품상 수상이 '크래쉬'에게 돌아간 것은 조금 의아했다. 권위적인 아카데미가 동성애를 밀어낸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물론 그당시 필자가 브로큰백은 봤지만 크래쉬는 보지 못했던 상황인지라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있었고 이전의 골든글로브의 잔상이 주는 영향도 있었다.
어쨌든 이 영화에 대한 궁금증은 상당히 컸다. 그리고 개인적인 판단에서 무언가 과격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오해까지 겹쳤다. 이 영화의 포스터-국내판이 아닌 오리지널 미국판-에서 절규하는 남자의 모습으로부터 강렬한 기운을 받았고 또한 제목 그 자체의 원론적인 과격함-충돌이라는-이 원인이 되었던 것.
미국이라는 나라는 참 특이하다. 17세기 청교도 탄압을 피해 건너간 프로테스탄트계의 영국인들이 처음 발을 딛은 아메리카의 시작은 500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안에 세계 최고의 강대국으로 성장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500년 남짓의 역사속에서 전세계의 모든 인종이 모인 세계 인종 박물관과 같은 USA의 오늘이 이루어졌다. 백인, 라틴 아메리카, 히스패닉, 흑인, 아랍인, 유태인, 동양인 등등. 과연 인류중 미국내에서 찾을 수 없는 인종이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아메리카 대륙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른 피부색과 다른 생활 양식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으로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다양성. 이것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지니는 강점이자 약점이다. 다양한 민족의 평화로운 공존이란 생각보다 어렵다. 동일한 민족간에도 대립과 불화가 빈번한데 타민족간의 충돌은 오죽하겠는가. 이는 멀리까지 내다보지 않아도 그 실례를 찾을 수 있다.
1992년 LA흑인폭동 사건이 가장 쉬운 예가 아닐까. 이 사건은 당시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LA에 거주하는 한인 교민들의 상점 피해가 막심했던 것. 이것은 백인 우월주의와 흑인의 열등의식간의 대립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소수민족간의 이권다툼을 둘러싼 감정적 갈등으로 번졌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말그대로 다른 인종간의 갈등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언제든 촉발될 수 있는 도화선과도 같다는 것이다.
수많은 인종이 모여서 사는 그 땅의 갈등에 과연 이해와 화해의 손길은 불가능한 것일까. 서로 갈등을 묵혀두고 가슴 깊이 새겨두었다가 적당한 시간에 폭발시켜야만 직성이 풀리는 현실일 것인가. 이 영화는 그런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서로의 단절된 공감대에 슬며시 손을 내민다.
일단 이 영화는 복잡하다. 그런데 복잡하지만 어지럽지 않다. 오히려 쉽게 정리가 된다.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제마다 각각의 사연을 지닌다. 16명의 군상들이 저마다의 인종을 대표하며 개인적인 사념을 펼쳐나간다. 그리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들은 서로간의 동선안에서 연관성을 지니며 크건 작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 이는 영민한 시나리오가 완성시킨 이야기의 탄탄함이 전달하는 즐거운 감동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기본적인 뼈대의 튼실함을 제대로 갖추었고 그 튼실함 위에 진실된 감동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각자의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나의 감동으로 엮어내는 구성력의 탁월함이 일원론적인 거대한 감동으로 승화된다.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억겁의 인연이라고 했다. 1겁이라는 것은 아주 얇은 비단조각으로 1만킬로미터의 대리석을 아주 가볍게 쓸어내려서 대리석이 다 닳아버리는 시간을 1겁이라고 한다. 그러니 억겁이라는 시간은 상상조차 되는가. 하지만 분명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이런 말도 안될것만 같은 격언은 실감나는 현실로 느껴질 법하다.
이 영화는 우리 주변에 산재된 인연의 소중함을 침착하면서도 영민한 눈빛으로 이야기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주된 인물들은 서로 전혀 연관이 없지만 서로간에 스쳐 지나는 인연의 알고리즘을 형성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자질구례할 법한 사소한 사연들을 놓치지 않고 주워담으며 작은 이야기들을 묶어서 커다란 하나의 화두로써 완성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우리는 그 수많은 사람들 중 일부와 마주친다. 그중에는 인생동안 둘도 없는 인연으로 맺어지는 이도 있고 그냥 한순간 인지조차 못하고 스쳐지나는 인연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러한 한 순간의 인연하나하나조차도 신비로운 일이 아닐까. 넓은 세상에서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 중 우연히 길 한복판에서 마주할 수 있는 사람들은 과연 우리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중에서 특별한 인연으로 발전할 수 있는 사람은 또한 얼마나 될까. 이것은 막연하게도 혹은 통계적인 확률적으로도 상당히 신비하면서도 엄두조차 못낼 사건이자 수치로 나타난다. 옷깃만 스쳐도 억겁의 인연이 있다는 불가의 진리가 이 영화를 통해 수긍할 수 밖에 없는 고귀한 담론으로 느껴지는 것은 비단 필자 뿐일까.
도시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일상에서 자유롭다고 느끼지만 그들은 실상 자신안에 갇혀지낸다. 꽉 막힌 콘크리트 벽안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은 개인성의 고집으로 인한 깊은 고독감 뿐. 그래서 현대인들은 외롭다. 현대인은 각박한 일상 안에서 갖혀서 이웃에 대한 관심을 지닐 여유를 잃었다. 그래서 메말라버린 정에 향수를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는 시작부터 정이 그리워서 사람들은 충돌(크래쉬)을 일으킨다고 한다. 마치 주목받고 싶은 어린아이처럼 사람들은 타인과 충돌하고 다툼으로써라도 자신이 살아가는 영역이 타인과의 공존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느끼고 싶어한다고 말한다.
이 영화는 현실적인 사소함들을 풀어놓지만 그 사소함은 신비롭게 빛난다. 마치 영롱하게 빛나는 이슬처럼 소박하지만 산재된 아름다운 일상의 굴레가 잔잔하게 흐른다.
우리는 과연 누구와 살고 있고 우리는 과연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가. 이 영화는 우리, 즉 타인의 존재 그 자체에 손을 내민다.
이 영화는 대립과 반목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화해와 공존에 대한 이야기다. 충돌과 갈등은 변화를 위한 모색이다. 그 과격함은 새로움에 대한 열망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내재된 불만은 현실이 아닌 미래를 향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충돌은 일시적으로 불안정하지만 탄탄한 내일을 예고한다. 비온 뒤 땅이 굳어진다는 말처럼 우리는 저마다 비를 맞고 있지만 단단한 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갈등하는 오늘을 견디는 것인지도 모른다.
단지 인종간의 갈등만이 이 영화의 충돌을 야기하지 않는다. 은연중에 스스로 지니게 되는 상대방에 대한 경계심과 은연중에 지니게 되는 잠재된 피해의식이 부르는 자학과 같은 아픔이 영화에서 각혈하듯 쏟아진다. 상대방의 무시와 차별때문이 아닌 본인 스스로가 지닌 편견과 선입견이 상대방을 밀어내고 서로 오해하게 만들고 갈등으로 야기되며 결국 충돌을 부른다. 이해보다는 배척을, 공감보다는 무시를 선택하는 배려하지 않는 삶 속에서 남는 것은 안전한 삶이 아닌 불편하고 두려운 삶 뿐이라는 것을 영화는 관객들에게 설득력있게 전달한다. 그리고 그러한 불편함과 두려움의 본질적 해소는 상대방이 아닌 본인에게 달려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악연도 필연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본인의 마음에 달려있는 법이라고.
물론 그 모든 결과가 항상 만족스럽거나 평화롭지만은 않다. 때론 자신의 신념을 무너뜨리는 예상밖의 비극으로 도출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의외의 혼란으로 맺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포기하려 했던 상대방의 이해를 돕기도 하고 끝없이 쌓아만 가던 분노를 한순간에 누그려뜨려주기도 한다. 잠재되어 있는 오해와 이유모를 증오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씻겨내려가게 만들어 준다. 이로써 손을 내밀 가치는 충분하다.
영화는 부담스러운 무게감을 지닌 소재를 일상적인 가벼움에 녹여 인상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켰다. 단지 아름다움에서 멈춘 것이 아닌 호소력있는 감동이자 영혼에게 전하는 직설적인 설득으로 나아간다. 정말 어떠한 찬사를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을 작품이 아닐까. 아카데미의 안목에 찬사를 던지며 멋적은 오해가 경솔했음을 시인한다.
타인과의 낯선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라며 영화는 웃음짓는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이렇게 살아가고 살아가야만 하지 않은가. 서로를 경계하고 더욱 높은 벽을 쌓고 문을 걸어잠글수록 결국 자신의 외로움과 고독감은 짙어진다. 서로에게 다가가고 벽을 허물고 문을 열어야만 우리는 좀 더 넓은 세상의 인연을 누릴 수 있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 낯설고 어렵겠지만 이해하고 다가간다면 우리의 삶은 좀 더 행복하고 풍족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영화는 손을 내밀고 있다. 우리도 모르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살아가는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나와 다른 너가 아닌 우리에게 말이다.
한없이 꼬이고 꼬여서 풀 수 없는 매듭이라 포기한다면 영원히 풀리지 않은 매듭으로 남는다. 하지만 한번씩 서서히 매듭을 풀어나간다면 언젠가 매듭이 풀리는 날이 온다. 매듭을 빨리 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매듭을 풀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다. 이 영화는 갈등과 차별이 내재된 인류적인 화합을 도모하고자 한다. 물론 영화는 소박하다. 그러나 본인도 모르게 서로간의 동떨어진 삶의 조각을 채우는 인연의 굴레를 통해 보여주는 내면적 감동은 영적인 울림을 동반한다.
사족을 하나 덧붙이자면 이 영화에는 한국인이 출연한다. 한국어 대사도 나온다. 하지만 그들의 이미지는 조금 불미스럽다. 뻣뻣하고 경직된 인상의 그들은 신경질적이고 야박하게 보일 정도이다. 이는 단지 이 영화에 불만을 돌릴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내 한인들이 스스로의 이미지를 조금 경직되게 만든 것은 아닌지, 외국인들에게 보여지는 우리의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될 법도 하지않을까.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말고 우리 스스로 우리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을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지 한번쯤 생각해볼만한 여지가 아닐까.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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