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이라는 현실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짊어진 특수성이다. 필자의 어린시절만 해도 빨갱이는 괴물과 같았다. 북한은 괴물이 득시글대는 적과도 같았고 김일성은 그 괴물들의 수장이자 물리쳐야 할 악의 축이었다.
많은 시절이 지난 오늘 북한은 더이상 적이 아니다. 동포이자 우리의 민족이다. 뿔달린 빨갱이도 없고 우리와 다를바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세월이 지난만큼 선동적인 정책에 휩쓸리던 진실이 제자리를 찾았고 그들에 대한 오해도 풀렸다. 그러나 여전히 그곳에 자유는 없다. 여전히 그들은 목숨을 건 탈북을 감행하며 자유를 찾아 중국의 대사관을 월담한다. 그들에게 남쪽땅인 대한민국은 코앞에 있지만 발을 들이밀기란 쉽지 않다. 자유는 코앞에 있건만 그 자유를 누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들은 진짜 뿔달린 빨갱이같은 현실안에서 살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북한에서 할아버지의 공적덕에 평양에 거주하며 평양 만수예술단에서 호른을 연주하는 김선호(차승원 역)는 이연화(조이진 역)와 사랑을 꿈꾼다. 하지만 당국의 위협에 의해 위기에 몰린 선호의 가족은 남한으로의 탈북을 결심하고 결행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희미해지는 선호와 연화의 언약은 둘 사이의 국경을 선명히 아로새기고 영화의 비장감을 전면에 드러내기 시작한다.
사실 분단이라는 소재는 영화적인 소재로 매력적인 면이 있다. 물론 지금까지 많은 영화를 통해 직접이나 간접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여전히 그 소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내에서 보편적인 특수성을 획득한다. 분단 국가라는 큰 사실을 통해 어떤 모양새의 외관을 갖추느냐, 어떤 형식의 감성을 장착하느냐는 마음먹기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되느냐 '쉬리'가 되느냐의 차이일 수도 있고 '간첩 리철진'이 되느냐 '간큰 가족'이 되느냐의 차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특별해 보이는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분단현실과 노골적으로 밀착시켰음이다. 물론 이전에도 분단과 사랑의 조우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주제를 위한 분단이라기 보다는 사랑이라는 주제와 동일한 측면에서의 분단이 존재했다. 이 영화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분단현실을 활용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조금 달라보인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고 했다. 그렇다. 사랑은 국경도 이념도 초월한다. 감정이란 건 생각보다도 쉽게 밀려들어오는 것이니까. 하지만 사랑은 국경이 없을 뿐 항상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이 영화의 사랑은 운명의 엇갈림을 논한다. 사실 운명이란 것이 존재하느냐고 묻는다면 어쩌면 운명이라는 것은 정해지는 현실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겠다. 살아가는 현실 그 자체가 운명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자신의 운명을 정해나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도 마찬가지 아닐까. 누구나 오늘의 사랑이 내일로 영원하길 바라지만 내일이라는 건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미지수의 운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쉽사리 내일을 논하지 않고 오늘안에서 헤매고 과거를 맴돈다.
선호는 연화와의 아름다운 사랑의 진행을 꿈꿨지만 그가 찾은 자유의 국경 남쪽에서 그 사랑은 아득하기만 하다. 그래도 그는 그 사랑을 염원하지만 현실은 순수하게 묵어가는 사랑만을 관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사랑의 원근감앞에서 좌절하고 슬퍼하며 현실을 수긍한다. 그러나 현실은 때론 가혹하다. 포기했던 것이 되돌아왔음에도 이미 너무 멀리 왔음에 되돌아가지 못함을 슬퍼해야 할 때가 있다. 자신이 꿈꾸던 사랑이 눈앞에 있지만 그 사랑을 취하지 못함은 현실이 주었던 대리만족에 대한 딜레마로 돌아온다. 그래서 3국으로 떠나자는 허황된 꿈을 품기도 하고 아릿한 옛추억에 젖어 그 순간만큼이나마 자신의 묻어두었던 사랑을 확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미 지나쳐버린 사랑의 균열을 허락하지 않는다.
영화의 결말은 허망한 듯 하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이다. 마치 '광식이 동생 광태'의 광식이처럼 선호는 사랑의 엇갈린 운명을 인정하듯 그냥 지난 추억을 가슴 한켠에 묻어두고 자신이 서 있는 현실의 노선을 묵묵히 걷는다. 분단이라는 거대한 벽을 세워 사랑의 엇갈림을 변명하지만 실상 그 운명적 엇갈림은 단지 영화적인 허구성만을 품지 않는다. 그가 최인훈의 '광장'에서의 이명준처럼 이념사이의 갈등에서 헤매는 건 아니니까 굳히 극단적인 선택을 할 필요는 없다. 그는 지극히 현실적인 삶안에서만큼은 적절한 삶을 수용하고 있으니까.
단지 사랑만을 위해서 지극히 비현실적인 판타지에 집착했다면 이 영화는 명백한 실패작에 머물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선호의 운명적 엇갈림이 품은 사회적인 원인을 이 영화는 잘 이해하고 있다. 그가 단지 사랑만을 위한 희생에 올인한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해 그 열의를 조각내야 했음을 이 영화는 간과하지 않는다. 그가 그의 삶의 유지도 사랑만큼 중요했음은 그의 순박한 성격이 남한사회의 비정함에 적응하기 위해 사랑도 한때 잊어야 했음에 대한 명백한 변명으로 작용되며 영화의 감성이 관객에게 수긍되는 근거가 된다.
이 영화는 그밖에도 볼거리가 많다. 평양의 시가지를 재현한 모습은 눈에 띄는 부분인데 평양에서 찍은 것이 아님에도 마치 평양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물론 필자가 평양을 가본 것은 아니라 평양과 흡사하다 말할 수는 없으나 비경험자가 그런 느낌을 받는다면 적어도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영화의 평양씬은 직접 평양에서 촬영하길 원했으나 북한 당국이 탈북자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에 거절했다고 한다. 결국 CG와 세트를 동원해서 평양시가지를 완성했다고 하는데 그 결과물은 나름대로 흡족해 보인다.
또한 배우들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차승원은 '혈의 누' 이후로 코믹배우 이미지를 떨쳐버렸다. 이번 영화 역시 그의 진지함을 소박하게 드러내는데 성공한 듯 하다. 배우의 색깔있는 변신은 언제나 관객을 즐겁게 한다. 필자는 그의 새로운 표정이 더욱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이진의 재발견도 인상적이다. 그녀는 이 영화를 통해 비로소 연기할 줄 아는 여배우로 올라설 듯 하다. 그녀의 똑부러지면서도 순박한 여인으로써의 열연은 본인이 캐릭터를 이해할 줄 아는 배우임을 입증하는데 성공한 것 같다.
21세기 대한민국은 북한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여전히 그들은 경계해야 할 대상이지만 분명 우리가 언젠가 끌어안아야 할 동포임은 확실하다. 수많은 탈북자들이 목숨걸고 대사관을 월담해야만 찾아오는 남한땅이 아닌 통일 한국의 미래는 분명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이며 언젠가 맞이해야 할 미래임은 확실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담에 가까운 영화지만 역시나 우리네 비극적인 현실에서 개인적인 비극이 도출되었음은 간과할 수 없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는데 여권이 있어도 갈 수 없는 북한땅에도 적용되는 말인지 모르겠다. 국경을 넘는데 목숨을 걸어야 하는 우리네 남과 북의 현실은 분명 영화의 감성과는 별도로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우리의 유한한 과제임은 분명하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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