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누구나 한 번은 길위에 서게 된다.
그 길 위에 사랑 증오 좌절 희망 배반을 토악질해내면서
고통이 동반되는 선택의 순간을 어김없이 맞이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따로 또 각기 길 위에 서 있고, 이기적이고 외로운 존재들이지만
길의 마지막에 구원이 있기를 바라는 나약한 자들이다.
나는 젊었던 시절에 역마살을 핑계로 자주 떠돌아 다녔고,
나의 청춘은 길 위에 준비되어 있었다.
그랬던 나였기 때문에 이 영화는 나에게 더욱 각별한 의미가 되었다.
길 위란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란 절대 알수 없을만큼 아름답다,
바닥을 모르게 아름답고, 또 딱 그만큼이나 비참하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달을 앓았고, 한달을 슬펐고, 한달을 눈물이 났다.
그런 이 영화는 길 위에선 인생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길.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숙명이다.
다른 이들에게 길은 갈갈이 찢겨진 인생을 다시 하나하나 그러모아 추스리고
그 끝에서 희망을 찾기 위한 도구이며.
또한 어떤 이들에게는 죽음이다.
길위가 숙명인 이들에게 길이란 정체성에 다름 아니며,
정착이라는 것은 그러한 정체성을 침해하는 것이다.
대식은 바로, 길이 숙명인 사람이다.
산악인이었던 대식은 떠나고 돌아와도 다시 털고 돌아 떠나는 것이 운명이다.
그런 그에게는 사랑 역시 자신의 신발 뒤축이 길위에 흩날리는 흙먼지일뿐이며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길위에 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일이다.
그런 그가 길 위에서 희망을 찾고자 하는 석원(정찬님)을 만나 사랑하게 되고
그것이 연정이었든 인정이었든 석원이 자신을 인정하게 되었을때
말하자면 거부되는 것이 필요악인 그의 사랑이 받아들여졌을때
당연하다는 듯이 그는 죽는다.
그러나 물론 이 영화는 '조금 다른' 길 위의 인생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동성애를 다룬다.
대식이 길위에 서야하는 이유는 사회의 테두리 안으로 편입할 수 없는 자신의 성정체성 때문이기도 하다.
한때나마 테두리 속으로 편입하기 위해 애썼던 대식은 결국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길을 택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 테두리에 반역하기 위해 길위로 나선 것이 아니라,
사실은 길위로 떠밀린 것이다.
머무름을 포기하는 것, 그것은 그가 버려야했던 것에 대한 단죄이다.
그러므로 그는 길이든 사람이든 어느 좌표에도 머무를 수 없다.
영화는 내내 대식을 통해 동성애자의 사랑이 이성애자의 사랑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일례로 이 영화는 남자들의 정사씬으로 시작한다.
초장부터 생뚱맞은 이 콘트라스트 높은 거칠고 적나라하고 거북한 정사씬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나는 이 장면을 충격요법이라고 생각한다.
은밀하고 에로틱하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더욱 추잡하고 더럽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일반’인 우리가 삐뚤은 호기심으로 살짝살짝 들춰보기만 하는, 그런 동성애는
사실은 당신들이 하는 이성애와 별 다를 것 없다는 것을 말하려 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어찌 똥꼬나 성기의 모양의 문제이겠는가.
길 위에 선 자들, 그들은 어쩌면 나선자가 아니라 내몰린 자일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버리고 버림받고 떠난다.
대식, 석원, 일주는 모두 버려졌고 버렸고 떠나고 있다.
하나같이 이기적이면서 외로운 존재인 그들이 길 끝에서 얻고자하는 구원은 무엇일까.
대식은 길 끝에서 묻는다.
‘나 너 사랑해도 되지’
사랑이 받아들여진 그 좌표,
거기에서 길은 끝난다.
나는 돌아가지 않더라도 돌아갈 곳은 있었으면 좋겠다.
덧붙임.
이 영화를 보고 한달을 내내 가슴먹먹함으로 고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영화속의 모든 인물들은 바로 저 자신이었으며 사랑스러웠고 증오스러웠고 안타까워서 눈물이 나고 아파서 힘들었어요.
영화 말미에 채석장에서 일하던 두사람이 다투고 결국 석원이 대식을 남겨두고 떠나는 장면이 나오지요,
대식이 돌아눕는 바로 그 장면에서 한대수님의 ‘사랑인지’라는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곡이예요, 예전에 아플때 많이 듣던 곡이었거든요.
대식이 아려오는 마음 때문에 몸을 웅크리던 모습과 한대수님의 그 노래가 제 머릿속에서 지금도 떠나지를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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