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소설가 공지영의 유명한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나는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아 별 기대없이 보게 되었는데 생각외로 은은한 감동과 생각해볼 거리를 제공한 영화였다. 물론 영화가 끝난후 같이 본 사람들끼리 나눈 토론 결과 원작 소설에 비해 너무 별볼일 없다는 의견, 배우의 연기가 별로라는 평, 감동적이지 않다는 의견 등 비판적 의견도 많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2등급 정도는 줄 수 있는 영화가 아닌가 싶었고 모두들 음악이 좋았다는 데에는 동의를 하는 것 같았다. 극중 주인공의 어머니가 피아니스트로 나오기때문에 베토벤의 월광같은 고전적 피아노 곡이 많은 배경을 이루었는데 참 잘 어울렸던 것 같다.
영화를 보는 도중, 그리고 보고 난 직후 내가 가장 주목했던 것은 사형제에 관한 것이었는데 범행 동기가 어떠했든 범죄를 저질렀으면 그에 마땅한 죄값을 치뤄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꼭 사형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법은 보복 대행의 의미보다는 전체적 사회의 안전 보장의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법이 사회 전체를 위해 소수의 의견을 묵살할 권리가 어디에 근거하는지를 생각해봤을 때 그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기에 고민을 하게되었다.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나 주민등록이 된 그 시점부터 대한 민국 헌법아래 보호된다. 하지만 때로는 법이 보호의 차원을 넘어서 나를 속박하기도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나의 동의를 얻지 않은 나에게의 이로운 행위를 문제삼을 사람은 없을테지만 나의 동의를 얻지 않은 나에게의 해로운 행위에 잠자코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나는 법의 보호를 받기 위해 법의 속박을 인정하겠다는 자발적, 구체적, 실재적 동의를 하였는가? 그럼에도 아무도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고 있는 것은 아마도 모든 상황을 조금의 치우침없이 해결할 수 있는 완벽한 법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과 현행법이 -요인보다 +요인이 더 많다는 두 가지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법이 개정되는 것은 -요인을 줄이고 +요인을 늘여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로 바뀔 수 있는 -요인이 어디 더 있나를 살피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하나의 소재로 한번 논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이 바로 사형제이다. 사형제의 여러 가지 모순점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A가 B를 살해했다. 그러면 B의 최측근인 C는 그 살인이 B 혹은 C의 부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A를 용서하든 두드려 패든 구워삶아먹든 여하튼간에 자신의 분이 풀릴 수 있는 어떠한 방법이든 시도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법은 한 개인인 C의 의견에는 상관없는 법의 기준에 의거해 A를 처리한다. 어떤 누군가가 A에 대해 법의 기준을 어기는 행위를 할 시에는 그것이 C라 할지라도 용서될 수 없다. 이러한 법의 기준에 항의하고 싶은 소수의 C들이 있다하더라도 그러한 C들의 의견에 항의하는 더 많은 수의 다른 사람들이 있기에 법의 기준은 지속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법도 하늘이 부여한 진리(예를 들면 E=MC^2)와는 거리가 먼, 단지 소수의 의견을 묵살한 힘있는 자들의 전유물이라고 볼 수 있을 듯 하다. 물론 이것이 나쁘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렇게 한번 바꾸어 말하면 사뭇 다르게 생각될 문제가 '법'이라는 좋은 이름으로 둔갑하고 있으면 그것의 참된 의미에 대해 일말의 불신을 갖지 않는 나를 포함한 세상 대다수 사람들의 무감각함에 경고를 표하는 것이다. 법의 각 조항에 정답이란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 수능 시험 문제처럼 수험생들이 시험을 치기 이전에 정답지가 마련되어 있는 시험이 아닌, 시험을 친 수험생들 중 가장 많은 수가 찍은 답이 정답으로 채택되는 시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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