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는 유대계 폴란드인이자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의 자전적 회고록을 바탕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진행되는 폴란드 게토 지역 한가운데에서 어느 유태인 피아니스트가 겪게 되는 지옥과도 같은 생사의 고비와 처절한 생존을 그린 감동의 실화 극이다..........
'스필먼의 회고록'의 담담한 어조에 매료됐던 폴란스키 감독은 연출 면에서 최악의 상황에서도 비명보다는 침묵을 선택했고,
이 영화를 통해 소리 없는 아우성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묘사해내고 있다..........
<피아니스트>는 예술과 현실의 괴리가 불러오는 비안간화와 파멸의 참상을 고발하는 동시에,
그러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정신적 힘을 주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는 사실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감독의 의도는 내러티브상의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침내 살아남은 스필만이 전쟁이 끝나고 소원대로 바르샤바의 방송국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마지막 장면에서 감정이 고양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인생과 예술은 살아남기 위한 고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이런 냉소적인 시선이 <피아니스트>를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이 영화는 아무 것도 과장하지 않으며 세상이 살육의 잿더미가 됐을 때 홀로 남은 자의 고독과 비루함과 생존 욕망을 잔인하리만치 고요히 응시하고 있다..........
<피아니스트>는 이렇듯 한 유대계 폴란드인 예술가의 생존 일지에서 어떤 영웅적 자취도 굳이 뽑아내지 않음으로써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막는다. 즉 이 영화는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흔한 인간승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수용소 밖에서 도피생활을 했던 사람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리고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흔히 있을법한 영웅주의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중립적이며, 그로인해 신선하고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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