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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이라는 이름의 이방인 잔혹한 출근
jimmani 2006-10-23 오전 1:53:01 1002   [4]

고리타분하다고 느끼실 수도 있겠지만 심심한 양해를 구하며, 고등학교 때 배웠던 시 한소절을 잠시 읊어보겠다. 이상의 <가정>이라는 시 중 일부다. 

"식구야 봉한 창호 어데라도 한구석 터놓아다고 내가 수입되어 들어가야 하지않나. (중략) 나는 그냥 문고리에 쇠사슬 늘어지듯 매어 달렸다. 문을 열려고. 안 열리는 문을 열려고."

이 시는 위기 상황에 놓인 가정의 밖에서 가장으로서의 임무를 다하지만 정작 가정 안으로 순조롭게 편입되지 못한 채 방황하는 가장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시가 지어진지 50년도 훨씬 더 됐음에도 꽤나 공감이 되는 건, 경제사정이 좋지 않은 가정이나 그 바깥에서 무던히 애를 쓰는 가장의 모습이나 현재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리라. 내가 뜬금없이 이 시 얘기를 꺼낸 것은, 마냥 당혹스런 시츄에이션 속에서 웃기기만 할 줄 알았던 이 영화 <잔혹한 출근>이 생각외로, 이런 부분을 제대로 찔렀기 때문이다.

착한 아내와 예쁜 딸을 둔 평범한 가장 동철(김수로)는 그러나 현재 최악의 상황이다. 주식투자 실패와 엄청난 사채 이자로 인해 파산 사태까지 가고, 급기야 직장도 잃은 상황이다. 다만 집에는 회사 다녀온다고 출근하고는 어떻게든 빚을 갚기 위해 동분서주할 뿐. 그러던 중 함께 같은 사채업자에게 같은 날 이자를 납부해 친분이 생긴 만호(이선균)가 뜬금없이 어린이 유괴를 제안하고 얼떨결이지만 잠시 아이를 빌린다는 심정으로 눈 꼭감고 유괴에 합류한다. 그러나 정작 부모에게 전화를 거니 100번이 넘게 시도를 해도 받지를 않고, 결국 그들의 첫 유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나 이제 사채 이자가 가족들까지 위협하겠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 동철은 만호의 두번째 유괴 계획에 또 한번 몸을 맡긴다. 그들이 지목한 대상은 여고생 태희(고은아). 그러나 타이밍 절묘하게도 태희는 말썽 못부려 안달인 문제아였고 그때문에 태희 아버지(오광록)마저도 "잘했다~"하면서 얼씨구나 한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최악의 상황이 동철을 덮치니, 그것은 "너의 아이를 유괴했다"는 또 다른 유괴범으로부터 온 전화. 만약 동철이 신고를 해버리면 자신의 유괴행적까지 모조리 발각되고 만다. 그러나 아이는 반드시 찾아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유괴범이 요구하는 금액을 동철이 유괴한 태희 집으로부터 얻어내야 하는데, 이렇게 패닉 상태로 추락해버린 상황 속에서 동철은 과연 유괴에 성공하고, 딸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

일단 이 영화가 코미디 영화로서의 기능 면에서 상당히 만족스럽다면 그 중 상당 부분의 공을 배우들의 쫄깃한 연기에 돌릴 수 있겠다. 우선 <흡혈형사 나도열>에 이어 두번째로 단독 주인공 역을 꿰찬 동철 역의 김수로는 이번 영화에서 "코미디 배우"라는 범주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는 꽤나 다양한 스펙트럼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가 기존에 출연한 매체를 통해 시원스런 이미지와 화려한 입담을 통해 코미디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강화시켜왔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코미디 쪽으로 특출날 수 있는 역할이 아니라 평범한 가장 역이라 그런지 한결 더 편안하면서도 수시로 웃기고, 나중엔 인간적인 공감대까지 효과적으로 형성하는 캐릭터를 보여주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몰려오는 사채 이자 쓰나미에 허덕이고 처음 해보는 유괴 앞에서 당혹스러우면서도 가족을 위해서라면 이 한몸 다 바치는 가장으로서의 모습이 코미디와 진지함을 오가는 김수로의 유연한 연기 덕에 확실히 잘 살아나지 않았나 싶다. 그도 이대로만 가면 송강호와 같은 코미디 출신 연기파 배우로의 길로 들어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철을 유괴의 늪으로 몰고 가지만 정작 자기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만호 역의 이선균 역시 코미디 연기로서 나무랄 데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목소리가 워낙에 좋은지라 다소 우려도 했지만 그 좋은 목소리로 심통 부리고 오버스럽게 소리치니 더 웃기게 들렸다. 가장으로서의 사명감까지 걸려 다소 진지하기도 한 동철에 비해 옆에서 끊임없이 말썽을 일으키고 아이처럼 구는 만호의 모습이 두 유괴콤비(?) 캐릭터의 균형을 잘 맞춰주지 않았나 싶다. 이는 자유자재로 펼쳐지는 이선균의 만화적 희극 연기가 큰 한 몫을 한 듯 싶다. 태희 아버지 역의 오광록 씨의 연기는 예상외로 영화 속에서 가장 웃긴 캐릭터에 손꼽힌다. 평생 명품으로만 치장하고 남들한테 명령만 하면서 안하무인격으로 살아온지라 눈에 뵈는 게 없는 그가 보여주는, 흔히 생각하는 "유괴극"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피해자 부모로서의 모습이 배꼽을 쏙 빠지게 했다. 경찰들한테 "최선을 다해!!"하고 소리 빽 지르고, 유괴범한테 "무슨 계획이 이 따위야!!!"하고 또 빽 소리치고, 자기는 평생 버스를 타본 적이 없다고 십만원짜리 수표를 내며 승객들한테 또 소리 빽 지르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호통아저씨"였다. 예의 그 느릿느릿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리를 빽 지르면서 긴장감을 확 깨는 그의 캐릭터는 확실히 이 영화가 코미디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다.

그외 자기도 금융업자라고 4시 30분까지만 이자받고 그 이후로는 가차없는 사채업자 주백통 역의 김병옥 씨의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조근조근 얘기하면서도 웃을 땐 거침없이 드러내는 그 악질적인 카리스마가 관객들까지 그의 웃음에 "어~"하고 거부감을 표시할 만큼 대단히 컬트적인 악역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당돌한 유괴 여고생 역을 맡은 고은아 역시 시도때도 없이 째려보고 대드는 문제아 여고생의 모습을 무리없이 잘 보여주었다. 아, 덤으로 특별출연으로 흥신소 사장으로 나오는 오만석의 동물성 지방 100%의 연기도 꽤나 재미있었다.

배우들의 튼실한 연기에다가 영화의 재미를 더해주는 것이 독특한 설정이다. 첫눈에 참 특이하다고 생각되는(헐리웃에서도 시도된 적이 거의 없는 듯한) "이중유괴"라는 설정은 주인공을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으로 몰고 감으로써 상대적으로 관객들에게 스릴과 긴장감을 제공한다. 헐리웃 영화인 <랜섬>과 같이 유괴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스릴러가 늘 긴장감을 잘도 조절하듯이, 이 영화 역시 예상치 못하게 변해버리는 상황과 그 속에서 안그래도 허접한 실력으로 더 우왕좌왕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웃음과 스릴을 동시에 안겨준다. 거기다 동철의 딸을 유괴한 의문의 존재가 등장하면서 "누가 유괴를 했는가?"에 대한 미스터리까지 안겨주고, 끝에 가서는 나름의 반전과 함께 범인을 공개하기도 한다. 하지만 막상 보면 "누가 유괴를 했는가?"보다는 "왜 유괴를 했는가?"가 더 궁금해지실 지도 모를 일이다. 암튼, 이 영화는 수준낮은 개그가 아닌 초난감 상황과 독특한 캐릭터로 코미디로서의 기능도 충실히 하면서, 독특한 소재로 긴장감을 꾸준히 유발하는 스릴러로서의 기능도 꽤 자연스럽게 해내고 있다. 영화가 내세운 "코믹서스펜스"라는 장르에 걸맞게 두 가지 재미를 동시에, 그것도 꽤 괜찮게 잡아낸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난 이 영화를 단순히 재미로 보고, 감동이래도 어차피 유괴된 아이를 찾기 위한 가장의 고군분투기니 가족의 소중함 정도로 무난하게 느끼겠거니 하고 봤는데 막상 보고 나니 그게 아니었다. 이 영화는 깊진 않을지라도 현대 가정 속 가장의 위치에 대한 비교적 진지한 고민이 들어있었다. 물론 이런 얘기가 영화 내내 암시되기 보다 결말에 이르러 확 마음에 와닿긴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닌 듯 싶다. 영화 속에서 사채 이자에 벌벌 떨며 유괴라는 극단적인 방법에까지 손을 대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영화 속에서의 충분히 희극적인 상황이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현실적인 상황임은 틀림없다. 화목한 가정을 꿈꾸지만 뜻하지 않은 빚더미때문에 먹고 사는데 집중도 못할 만큼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하는 가장들의 애환이 다소 과장되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철과 만호는 매번 용케도 타이밍 잘 맞춰서 이자를 납부하지만, 뒤이어 정말 아까운 시간차로 늦게 도착한 한 남자가 어깨분들에게 끌려가는 장면을 보고 있자면 웃기기보다 괜히 짠해지는 이유는, 그가 조폭이나 유별난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서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이 영화는 주인공부터 특정 지위가 아니라 "평범한 가장"이라는 점에서부터 출발해서, 그만큼 나한테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전제를 깔게 되는 현실적인 공감을 효과적으로 얻어낸다. 돈의 무게감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멍들어가는 소시민의 고단한 삶에 대한 공감 말이다.

이렇게 돈이라는 물체에 끊임없이 짓눌리며 사람이 돈을 먹는 게 아니라 돈이 사람을 먹는 현실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비추고 있는 이 영화는, 결말로 다다르면 돈때문에 허우적거리느라 가정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가장의 모습도 꽤나 비중있게 비추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남자든 여자든,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라면 "가장"이라는 명함을 달고 사회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할 것이다. 언제나 가족 얼굴을 생각하고 그걸로 힘을 얻지만 사회 생활에 바쁘게 되면 가정에 직접 들어가 신경 쓸 겨를은 갈수록 줄어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가족을 위하는 마음마저도 만만치 않은 사회생활의 비중으로 인해 이제 가족들에겐 무디게만 보일 만큼 어느덧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떻게 좁히기 힘든 가족들과의 심리적 거리감을 형성하는 결과가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가족들을 집에 두고 바깥에서 삶을 위해 아등바등하지만, 그런 노력으로 인해 오히려 가족들과 심리적으로 멀어질 수 밖에 없는 가장의 외로움에 대해 얘기한다. 영화 속에서도 동철은 며칠 씩이나 아내에게 출근한다고 해놓고는 주식을 하거나 차를 팔아서라도 이자를 마련하고, 심지어는 유괴라는 몹쓸 범죄까지 저지르는데,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가족들은 그가 일자리를 잃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른다. 집을 떠나 사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어쩌면 가장이라는 존재들은 또 다른 의미의 이방인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끊임없이 가족을 생각하고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사회생활에 애쓰지만 오랫동안 비는 자리는 어쩔 수 없는지,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족과의 마음은 자신으로부터 한발짝씩 뒤로 물러서니 말이다. 이전처럼 가장이 집안에서 압도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시대가 아닌 만큼, 이들이 느끼는 이런 거리감은 더 난감한 상황으로 흘러갈 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영화는 어느덧 자신이 가정과 꽤나 멀어져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동철의 모습을 통해, 그리고 결정적 결말 속의 어떤 인물의 사연을 통해 점차 가정 내에서 자신의 위치가 퇴색되어 가는 가장들의 외로운 모습을 한켠에 인상깊게 그리고 있다. 자신은 분명 가족을 위해 노력하는데도 가족들의 그를 향한 마음은 점점 멀어지는, 대단히 안타까운 상황 속에 힘들어 하는 가장들에 대해 공감과 위로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제목도 참 절묘하게 잘 지은 것 같다. 영화 속에서 초난감한 상황 때문에 주인공들에게 출근이 잔혹한 상황으로 돌변하지만, 정작 평범한 소시민들에겐 "출근"이라는 행위가 집을 나서고 사회생활에 더 가까워지는 순간 가정과의 심리적 거리는 한 걸음씩 멀어지는 걸 각오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잔혹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다.

모처럼 꽤나 난감한 상황 설정과 탄력 붙은 배우들의 연기로 오락영화로서의 재미로 충실히 준 이 영화 <잔혹한 출근>은 이처럼, 현실과도 꽤나 밀접하게 맞닿아 있어서 웃음 뒤의 현실의 씁쓸함과 안타까움도 함께 남기는 어느 정도의 무게도 가진 영화가 되지 않았나 싶다. 조폭이라는 질리디 질린 구조 속에서 일차원적인 유머만 구사하는 영화거나 아니면 진부한 선코믹 후감동 모드의 고만고만한 코미디 영화들이 대부분이었던 한국영화계에서 이 영화는 분명 두드러진다. 화통한 웃음과 꽤 튼튼한 스릴, 그리고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는 불안한 현실이 맞닿아 보고 나서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영화가 되지 않았나 싶다. 아, 가장의 삶이란 이리도 고단한 것인가. 나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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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출근(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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