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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전선의 꿈과 혁명을 노래하라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peacenet 2006-11-29 오전 5:50:08 1179   [5]

엄마 뱃속의 남동생에게 오필리아는 다음과 같은 옛날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주 오랜 옛날,
슬픔에 잠긴 머나먼 나라에 -

높고 험준한 산 꼭대기에서
매일밤 꽃을 피우던 장미가 한송이 있었단다.
그 장미를 꺾어오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었다고 그랬지만,
산을 에워싼 장미넝쿨의 가시엔 맹독이 있어서
아무도 감히 그 근처에 가지를 못했단다.

사람들은, 그 가시넝쿨의 공포와 고통, 죽음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했고
그 장미꽃이 약속한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단다...

그렇게 매일매일, 장미는 꽃을 피웠다가는 시들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점차 잊혀져 갔단다...

1944년의 스페인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이 이야기는 사실 파시스트 반군에 쫒겨 산으로 올라간 마지막 인민전선 게릴라들을 노래하는 이야기다. 그 치열했던 과거에 비해 너무도 잊혀진 역사, 스페인의 내전은 또하나의 묻혀진 아픔이다. 우익 파시스트 군부와 좌익 인민전선의 싸움은, 한편 전쟁으로 인한 참혹한 비극이기도 하지만 다른한편 쿠데타의 군화발에 짖밟혀간, 공화주의의 못다한 꿈과 이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 "판의 미로" 에서 감독은 어린 소녀 오필리아를 중심으로 그 잊혀진 약속을 동화처럼 그려내고, 그 동화가 시사하고자 하는 바를 1944년의 스페인을 배경으로 투영해 낸다. 만삭의 몸을 이끌고 남편의 전장으로 와야만 했던 카르멘, 그리고 그의 남편이자 반군 사령관인 비달. 하녀 메르세데스는 동생을 위해, 또 의사는 정의와 생명의 신념을 위해 몰래 게릴라들을 지원한다. 그 동족상잔의 비극의 현장에서, 오필리아는 모안나 공주가 되어 동화 속으로 끝없이 도피해 간다.

오필리아가 정말 지하세계의 공주인지, 또 그 소녀가 만난 곤충이 정말 요정인지. 그 요정이 이끄는 대로 찾아간 미로의 끝에서, 정말 판을 만났는지. 영화속에서 현실과 판타지가 공존을 유지하는 경계는, 판이 준 백묵으로 그려낸 문 처럼 한번 열렸다가는 이내 흔적도 없이 닫혀 버린다. 그런가 하면, 맨드레이크 뿌리를 우유속에 담아서 엄마의 침대밑에 놓아두는 것 처럼 실제적이며 구체적이다.

커다란 나무의 뿌리에 자리를 잡고 나무의 정기를 빨아먹고 사는 괴물 두꺼비 이야기도, 또 음식이 가득 차려진 상을 지키는 식인귀 이야기도 모두 공화주의자들의 못다이룬 꿈과 이상을 그려내는 동화들이다. 민중의 자유와 각성을 일깨우기를 지향하는 그들의 민주주의 이념이며, 물질과 부의 공평한 재분배를 꾀하는 그들의 평등사상이다. 게릴라를 생포해서는 끔찍한 고문을 자행하고, 토끼를 사냥하였다는 농부를 게릴라로 몰아 즉결처분을 할 만큼 잔혹한 비달 사령관이 파시스트 군부를 대변한다면, 그 반대편엔 인정많고 따뜻한 메르세데스와, 나약하지만 인간존중의 신념을 실천하려는 의사는 각각 민중과 중산층을 대변한다. 그럼 오필리아는? 이렇듯 잔혹한 현실과 이상을 잇는 매개가 되겠지.

처음 두개의 관문을 힘겹게 마감하고, 오필리아가 마지막 관문으로 다가설 즈음 해서는 현실속의 이야기도 절정에 이르른다. 결국 게릴라는 반군 사령부를 습격하고, 그 치열한 전장 가운데 오필리아는 갓 태어난 제 동생을 품에 안고 미로로 도망을 한다. 지하세계로 향하는 문 앞에서 판은, 그 문을 열기 위해서는 아기동생의 - 순수한 다른 이의 - 피가 필요하다고 얘기해 준다. 완벽한 결말이다. 계몽과 평등을 지향하는 인민전선의 꿈과 이상은, 그것으로의 숭고하기 그지없는 희생으로써 마감된다.

좌익 인민전선의 못다한 공화주의 혁명을 노래하는 이 영화, 그런 면에서 상당히 불온하다. 동화의 입을 빌어 시대의 아픔을 그려내었을지언정, 목적지향적이며 다분히 전위적이다. 그러기에, 섣부른 유아적 감상만을 기대하고 영화관을 찾았다간 낭패보기 십상이다. 그 시대가 참혹했던 만큼,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그려내는 판타지 또한 결코 아름답지가 못하다. 슬픔은 잔잔하지가 않고 격하고, 이야기는 화려하거나 섬세하지 않고 무자비하며 거칠다. 그 속에서 끊임없이 화자되는 메세지는 평화와 조화를 추구하지 않고 무력적이다. 이렇듯 강하고 부담스러운 색채를 띤 이 영화에 관객이 호응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영화가 담고 있는 이렇듯 선동적인 코드에 있다.

이념적 지향성을 띠는 영화. 슬픔을 분노로 승화시켜 내는 영화. "판의 미로" 는 잊혀지고 묻혀진 시대의 아픔을 극적으로 포장해낸 영화이며, 관객의 격한 감정을 동화라는 매체를 통해 승화시켜낸 영화다. 높고 험준한 산 꼭대기에서 잊혀갔던 장미의 약속, 영원한 생명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공포와 고통, 죽음의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이 메세지는 절실한 깨달음으로 다가선다. 감독은 말한다, 모안나 공주가 지상에 남기고 간 흔적은, 어디를 봐야 할 지를 아는 사람들의 눈에는 보일 것이라고.

- 현 -


(총 0명 참여)
eye2k
스페인 내전을 알아야 이영화를 보는게 아닌데...참 갑갑하네...암울하고 추악 잔인한 현실만 보면 되는 것을...스페인 내전이면 어떻고 한국전쟁이면 어떤가? 참으로 답답하시다.   
2006-11-30 08:47
peacenet
더불어,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과 관련한 기사도 많이 도움이 될겁니다.
http://www.movist.com/article/read.asp?type=24&type2=2&id=13160   
2006-11-30 01:34
peacenet
아래 ldk209 님의 "파시즘에 저항하는 소녀의 판타지" 에서, 스페인의 내전에 대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정도만 알아도 충분할겁니다. 전 거기까지도 모르고 영화를 봤습니다만..   
2006-11-29 23:43
hongdding
음.. 그렇군요... 그저 단순히 해리포터나 반지의제왕같은 판타지라고만 생각하고 봤다간 낭패겠군요... 미리 공부 많이~ 하고 가야겠어요.. ^^   
2006-11-29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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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2006, Pan's Labyrin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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