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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노 다키시라는 미지와의 조우 다케시즈
kharismania 2006-12-05 오전 3:11:58 712   [2]
기타노 다케시. 그에 대한 첫인상은 무표정이다. 그에 대한 두번째 인상은 마초적 폭력성이다. 그에 대한 세번째 인상은 남성적 고독이다. 사실 그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처음 그가 코미디언으로 연예계에 입문했다는 것 따위는 들먹이지 않아도 좋다. 굳히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한다면 프롤로그는 처음 영화에 출연했던 1983년작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가 자리를 잡으면 되고 첫주연에 첫 감독까지 맡은 '이남자, 흉폭하다.'가 기타노 타케시라는 이름을 이야기하는 본론의 적절한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가 감독행세를 할때 기타노 다케시라는 이름을 사용한다는 것도 어쩌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라고 말하고 싶다. -그 이외에 그는 '비트 다케시'라는 예명을 사용한다.

 

 이 영화는 사실 지독하게 난해하고 관객을 유린하듯 자기 중심적이다. 영화를 보면 일본 개봉 당시 베니스 영화제 상영후 인터뷰한 100여명의 관객중 6명정도만이 영화를 이해했다고 밝힌 감독 자신의 말은 전혀 과장되어보이지 않는다.

 

 언뜻 이 영화를 이미지만으로 짐작한다면 '존 말코비치 되기'가 떠오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화를 보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두 영화는 세계관에 대한 목적의식부터가 다르다. 전자가 한 인물에 대한 사유를 통해 몽상적인 세계관을 확장하지만 후자는 한 인물에 대한 사유를 통해 그 단편적 세계관에 대한 지독한 몰입에 침식해가는 형태다.

 

 시작은 마치 2차대전 당시 미국과의 대립관계에 놓인 일본의 패전직전의 상황과도 같다. 여기저기 쓰러진 일본군 병사들의 주검이 널부러진 건물안으로 조심스레 진입하는 미군들. 그리고 그 안에 쓰러져 있던 한 사람은 서서히 의식을 회복하고 자신의 눈앞에 서있는 미군병사와 마주친다. 그는 다케시. 그리고 급속한 페이드 아웃. 그리고 그 어둠같은 스크린 위로 박히는 TAKESHIS'라는 제목. 말 그대로 이 영화는 '다케시들의'라는 제목처럼 다케시의 내면에 엉켜있는 그의 도플갱어같은 내면들을 비규칙적 나열로 풀어낸다.

 

 사실 오프닝 장면은 다케시의 첫 출연작인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를 상기시키게 한다. 물론 그 배역의 비중과는 무관하게 단순히 그의 필모그래피로부터 끌어내어지는 연상작용이다. 또한 이는 이영화가 어느 지점을 관통하고 있는가에 대한 희미한 근거가 된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다케시들의 세계. 사실 기타노 다케시라는 하나의 인물로부터 펼쳐져보이는 혼란스러운 내면의 향연. 경계조차 명확하지 않은 현실과 비현실간의 간극과 시공간의 무자비한 이탈은 그 내면의 혼란스러운 다변적 구조를 상정적으로 드러낸다.

 

 영화와 현실은 비현실과 현실의 경계로 정의되어진다. 영화배우 비트 다케시가 자신과 빼다박은 기타노와 대면하는 순간 영화속의 시공간은 이미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마치 도플갱어와도 같은 이면적 본인과의 대면. 물론 영화속의 두인물은 엄연히 다른 타인이지만 관객에게 읽혀지는 두인물은 위계의 지정학적인 면에서 하나의 인물을 관통한다. 기타노 타케시를 분리하듯 영화에서 두인물은 각각 '타케시'와 '기타노'로 나누어 명명된다. 이는 두인물간의 방점의 차별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적 효과를 거둔다.

 

 대배우이자 스타로써 연예계에 권력같은 힘을 지닌 '타케시'와 무명 단역 배우에 불과한 '기타노'의 삶은 기타노가 타케시를 동경하는 일방적 관계로 소통된다. 사실 영화속의 수많은 장면들은 기타노 타케시의 필모그래피를 연상하게 만든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오프닝 이후 자막이 나온 뒤 곧바로 뒤를 잇는 것은 야쿠자로써의 총격전씬이다. 타케시는 상당히 위험한 처지에서 과감하게 방아쇠를 당기고 자신과 대립한 조직을 비롯해 자신의 부하들까지 죄다 죽어나자빠지는 순간까지 총알한방 맞지않고 그 자리를 유유히 빠져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작스럽게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 서서히 줌아웃되는 TV바깥에서 그는 야쿠자들과 한 공간에서 마작을 즐긴다. 그곳은 영화가 아닌 현실. 타케시는 영화에서 현실로 돌아온다. 하지만 기타노는 현실에서 영화로 점점 몰입한다. 마치 꿈과 현실의 경계를 어지럽게 만들 정도로 기타노는 깨어나는 행위를 수차례 반복한다. 그 반복안에서 그는 총을 손에 넣고 자신이 동경하는 다케노의 페르소나가 된다. 그는 마치 영화속의 다케시처럼 쌍권총을 들고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총질을 해댄다. 여기서부터 다케시와 기타노간의 경계가 서서히 무너져내린다.

 

 재미있는 건 영화속을 맴도는 인물들이 각각 하나의 인물이 아닌 1인 2역 이상의 역할을 소화한다는 것이다. 타케시의 비서는 택시운전사가 되었다가 사무라이로 등장하기도 하고 뚱뚱한 만담꾼들은 편의점의 손님이 되기도 하는 등 동일한 인물들이 영화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둘레를 맴돈다. 이는 다케시와 기타노를 왔다갔다하는 기타노 다케시의 모습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다. 그건 이 영화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필모그래피들의 발견과도 무관하지 않다. 마치 '소나티네'의 엔딩을 변용한 것 같은 타케시의 드라마 연기장면이나 '하나비'의 바닷가 씬을 노골적으로 인용한 장면, 그리고 그장면속에서 등장하는 사무라이 무사들은 '자토이치'를 떠올리게 한다. 결과적으로 영화라는 하나의 세계가 하나의 비현실적 공간으로써 이 작품속에서 드러날 때 그 공간의 이동과 함께 인물들의 모습도 변형된다. 이는 영화라는 하나의 비현실성이 드러나는 측면인데 결국 영화속의 인물을 연기하는 연기자가 영화라는 외피를 벗겨낸 본질적 자신의 내피는 영화안에서 사유되는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기타노 타케시라는 배우 스스로가 영화와 현실을 끊임없이 이탈하거나 이탈되어야 하는 모습에 대한 사유로 받아들여진다.

 

 배우로써 몰입해야하는 영화속의 자신은 때론 현실보다도 더욱 자신을 각인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는 영화를 벗어난 현실을 드러낸 다케시의 모습과 대비되어 나타나는 기타노의 망상과도 같은 비현실적 공간을 통해 드러나는데 무명배우에 불과한 기타노가 영화와도 같은 비현실적 꿈속에서 자신이 동경하는 다케노의 세계에 진입하는 것은 결국 기타노라는 하나의 인물을 다케노와 대비시켜 기타노 다케시라는 인물이 짊어진 모순된 세계관을 드러내려는 심산에 가깝다.

 

 일정한 틀은 없지만 이야기는 집합체와 같은 확장되는 단계적 진폭성을 띤다. 마치 소전제의 끝에서 드러나는 외피들의 확장형과 같이 비현실과 현실의 공간적 확대는 마지막까지 거듭난다. 재미있는 것은 잠이 드는 순간은 발견되지 않으나 깨어나는 순간은 거듭된다는 것이다. 결국 기타노라는 인물은 거듭되는 환상의 반복을 통해 다케시의 대비적 모순임이 강조됨과 동시에 결과적으로 기타노 타케시의 비영화적 태도를 띠는 그의 상징성이 다케시를 그의 페르소나로 지정하는 것이다. 결국 기타노 다케시라는 인물은 기타노를 통해서도 다케시를 통해서도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결국 그는 도플갱어와도 같은 두인물의 결합체. 즉 영화적 페르소나와 현실적 자아의 두갈래적 이해를 결합해야만 이해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본질적인 한 인물의 완성에 도달해야만 하는 이야기는 기타노 다케시라는 세계관에 대한 추억어린 사유나 명예적 숭상이 아닌 황폐하기 짝이 없는 진행적 여운을 남긴다.

 

 결국 그의 세계는 지속될 것이다. 그가 예전보다는 미약한 이야기꺼리로 영광과는 멀어져가더라도 그는 분명 자신의 분열증같은 세계관을 어지럽게 드러낸 것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무표정하게 내뱉어버릴 것이다. 이 작품은 그의 세계에 대한 정리될 수 없는 정의와도 같다. 이는 기타노 다케시라는 이름안에서 사유되어야 할 지극히 사적인 사연이다. 결국 이 영화를 통해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했다해도 실망할 이유는 없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에서 출발한 비타협적인 상징물의 비규칙성 나열은 분명 친절하지 않은 대화법이니까 그 대화법에 익숙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다만 기타노 다케시라는 이름에 의미를 지니고자 하는 이라면 이영화를 눈여겨 볼 것을 권한다. 오토바이 사고로 뇌수술을 받은 이후로 마비된 오른쪽 얼굴 탓에 왼쪽눈만을 깜빡이는 그의 얼굴처럼 이 영화는 아수라와 같은 양면성으로 발현되는 그의 내면을 헤집어끌어내는 것만 같다. 결국 그는 시작으로 되돌아가 끝내지 못했던 시작의 끝을 마감한다. 하지만 그 끝에 존재했을 '컷'소리와 함께 꽃다발을 안은 그의 모습이 상상된다. 이는 결국 이 영화속의 '기타노''다케시'의 간극속에서 헤매던 관객이 지닐 수 있는것은 기다리고 목격해야 하는 그의 미래적 행보에 대한 의지적 예감이 아닐까.

                                    -written by kharismania-

기타노 다케시. 그에 대한 첫인상은 무표정이다. 그에 대한 두번째 인상은 마초적 폭력성이다. 그에 대한 세번째 인상은 남성적 고독이다. 사실 그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처음 그가 코미디언으로 연예계에 입문했다는 것 따위는 들먹이지 않아도 좋다. 굳히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한다면 프롤로그는 처음 영화에 출연했던 1983년작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가 자리를 잡으면 되고 첫주연에 첫 감독까지 맡은 '이남자, 흉폭하다.'가 기타노 타케시라는 이름을 이야기하는 본론의 적절한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가 감독행세를 할때 기타노 다케시라는 이름을 사용한다는 것도 어쩌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라고 말하고 싶다. -그 이외에 그는 '비트 다케시'라는 예명을 사용한다.

 

 이 영화는 사실 지독하게 난해하고 관객을 유린하듯 자기 중심적이다. 영화를 보면 일본 개봉 당시 베니스 영화제 상영후 인터뷰한 100여명의 관객중 6명정도만이 영화를 이해했다고 밝힌 감독 자신의 말은 전혀 과장되어보이지 않는다.

 

 언뜻 이 영화를 이미지만으로 짐작한다면 '존 말코비치 되기'가 떠오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화를 보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두 영화는 세계관에 대한 목적의식부터가 다르다. 전자가 한 인물에 대한 사유를 통해 몽상적인 세계관을 확장하지만 후자는 한 인물에 대한 사유를 통해 그 단편적 세계관에 대한 지독한 몰입에 침식해가는 형태다.

 

 시작은 마치 2차대전 당시 미국과의 대립관계에 놓인 일본의 패전직전의 상황과도 같다. 여기저기 쓰러진 일본군 병사들의 주검이 널부러진 건물안으로 조심스레 진입하는 미군들. 그리고 그 안에 쓰러져 있던 한 사람은 서서히 의식을 회복하고 자신의 눈앞에 서있는 미군병사와 마주친다. 그는 다케시. 그리고 급속한 페이드 아웃. 그리고 그 어둠같은 스크린 위로 박히는 TAKESHIS'라는 제목. 말 그대로 이 영화는 '다케시들의'라는 제목처럼 다케시의 내면에 엉켜있는 그의 도플갱어같은 내면들을 비규칙적 나열로 풀어낸다.

 

 사실 오프닝 장면은 다케시의 첫 출연작인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를 상기시키게 한다. 물론 그 배역의 비중과는 무관하게 단순히 그의 필모그래피로부터 끌어내어지는 연상작용이다. 또한 이는 이영화가 어느 지점을 관통하고 있는가에 대한 희미한 근거가 된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다케시들의 세계. 사실 기타노 다케시라는 하나의 인물로부터 펼쳐져보이는 혼란스러운 내면의 향연. 경계조차 명확하지 않은 현실과 비현실간의 간극과 시공간의 무자비한 이탈은 그 내면의 혼란스러운 다변적 구조를 상정적으로 드러낸다.

 

 영화와 현실은 비현실과 현실의 경계로 정의되어진다. 영화배우 비트 다케시가 자신과 빼다박은 기타노와 대면하는 순간 영화속의 시공간은 이미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마치 도플갱어와도 같은 이면적 본인과의 대면. 물론 영화속의 두인물은 엄연히 다른 타인이지만 관객에게 읽혀지는 두인물은 위계의 지정학적인 면에서 하나의 인물을 관통한다. 기타노 타케시를 분리하듯 영화에서 두인물은 각각 '타케시'와 '기타노'로 나누어 명명된다. 이는 두인물간의 방점의 차별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적 효과를 거둔다.

 

 대배우이자 스타로써 연예계에 권력같은 힘을 지닌 '타케시'와 무명 단역 배우에 불과한 '기타노'의 삶은 기타노가 타케시를 동경하는 일방적 관계로 소통된다. 사실 영화속의 수많은 장면들은 기타노 타케시의 필모그래피를 연상하게 만든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오프닝 이후 자막이 나온 뒤 곧바로 뒤를 잇는 것은 야쿠자로써의 총격전씬이다. 타케시는 상당히 위험한 처지에서 과감하게 방아쇠를 당기고 자신과 대립한 조직을 비롯해 자신의 부하들까지 죄다 죽어나자빠지는 순간까지 총알한방 맞지않고 그 자리를 유유히 빠져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작스럽게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 서서히 줌아웃되는 TV바깥에서 그는 야쿠자들과 한 공간에서 마작을 즐긴다. 그곳은 영화가 아닌 현실. 타케시는 영화에서 현실로 돌아온다. 하지만 기타노는 현실에서 영화로 점점 몰입한다. 마치 꿈과 현실의 경계를 어지럽게 만들 정도로 기타노는 깨어나는 행위를 수차례 반복한다. 그 반복안에서 그는 총을 손에 넣고 자신이 동경하는 다케노의 페르소나가 된다. 그는 마치 영화속의 다케시처럼 쌍권총을 들고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총질을 해댄다. 여기서부터 다케시와 기타노간의 경계가 서서히 무너져내린다.

 

 재미있는 건 영화속을 맴도는 인물들이 각각 하나의 인물이 아닌 1인 2역 이상의 역할을 소화한다는 것이다. 타케시의 비서는 택시운전사가 되었다가 사무라이로 등장하기도 하고 뚱뚱한 만담꾼들은 편의점의 손님이 되기도 하는 등 동일한 인물들이 영화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둘레를 맴돈다. 이는 다케시와 기타노를 왔다갔다하는 기타노 다케시의 모습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다. 그건 이 영화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필모그래피들의 발견과도 무관하지 않다. 마치 '소나티네'의 엔딩을 변용한 것 같은 타케시의 드라마 연기장면이나 '하나비'의 바닷가 씬을 노골적으로 인용한 장면, 그리고 그장면속에서 등장하는 사무라이 무사들은 '자토이치'를 떠올리게 한다. 결과적으로 영화라는 하나의 세계가 하나의 비현실적 공간으로써 이 작품속에서 드러날 때 그 공간의 이동과 함께 인물들의 모습도 변형된다. 이는 영화라는 하나의 비현실성이 드러나는 측면인데 결국 영화속의 인물을 연기하는 연기자가 영화라는 외피를 벗겨낸 본질적 자신의 내피는 영화안에서 사유되는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기타노 타케시라는 배우 스스로가 영화와 현실을 끊임없이 이탈하거나 이탈되어야 하는 모습에 대한 사유로 받아들여진다.

 

 배우로써 몰입해야하는 영화속의 자신은 때론 현실보다도 더욱 자신을 각인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는 영화를 벗어난 현실을 드러낸 다케시의 모습과 대비되어 나타나는 기타노의 망상과도 같은 비현실적 공간을 통해 드러나는데 무명배우에 불과한 기타노가 영화와도 같은 비현실적 꿈속에서 자신이 동경하는 다케노의 세계에 진입하는 것은 결국 기타노라는 하나의 인물을 다케노와 대비시켜 기타노 다케시라는 인물이 짊어진 모순된 세계관을 드러내려는 심산에 가깝다.

 

 일정한 틀은 없지만 이야기는 집합체와 같은 확장되는 단계적 진폭성을 띤다. 마치 소전제의 끝에서 드러나는 외피들의 확장형과 같이 비현실과 현실의 공간적 확대는 마지막까지 거듭난다. 재미있는 것은 잠이 드는 순간은 발견되지 않으나 깨어나는 순간은 거듭된다는 것이다. 결국 기타노라는 인물은 거듭되는 환상의 반복을 통해 다케시의 대비적 모순임이 강조됨과 동시에 결과적으로 기타노 타케시의 비영화적 태도를 띠는 그의 상징성이 다케시를 그의 페르소나로 지정하는 것이다. 결국 기타노 다케시라는 인물은 기타노를 통해서도 다케시를 통해서도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결국 그는 도플갱어와도 같은 두인물의 결합체. 즉 영화적 페르소나와 현실적 자아의 두갈래적 이해를 결합해야만 이해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본질적인 한 인물의 완성에 도달해야만 하는 이야기는 기타노 다케시라는 세계관에 대한 추억어린 사유나 명예적 숭상이 아닌 황폐하기 짝이 없는 진행적 여운을 남긴다.

 

 결국 그의 세계는 지속될 것이다. 그가 예전보다는 미약한 이야기꺼리로 영광과는 멀어져가더라도 그는 분명 자신의 분열증같은 세계관을 어지럽게 드러낸 것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무표정하게 내뱉어버릴 것이다. 이 작품은 그의 세계에 대한 정리될 수 없는 정의와도 같다. 이는 기타노 다케시라는 이름안에서 사유되어야 할 지극히 사적인 사연이다. 결국 이 영화를 통해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했다해도 실망할 이유는 없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에서 출발한 비타협적인 상징물의 비규칙성 나열은 분명 친절하지 않은 대화법이니까 그 대화법에 익숙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다만 기타노 다케시라는 이름에 의미를 지니고자 하는 이라면 이영화를 눈여겨 볼 것을 권한다. 오토바이 사고로 뇌수술을 받은 이후로 마비된 오른쪽 얼굴 탓에 왼쪽눈만을 깜빡이는 그의 얼굴처럼 이 영화는 아수라와 같은 양면성으로 발현되는 그의 내면을 헤집어끌어내는 것만 같다. 결국 그는 시작으로 되돌아가 끝내지 못했던 시작의 끝을 마감한다. 하지만 그 끝에 존재했을 '컷'소리와 함께 꽃다발을 안은 그의 모습이 상상된다. 이는 결국 이 영화속의 '기타노''다케시'의 간극속에서 헤매던 관객이 지닐 수 있는것은 기다리고 목격해야 하는 그의 미래적 행보에 대한 의지적 예감이 아닐까.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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