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제임스 본드는 사실 냉전시대의 아이콘이다.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대립속에서 그의 활약은 자유진영의 월등함과 이념적 명분을 보여주는 프로파간다와도 같았다. 하지만 냉전시대가 종식되고 007의 역할은 명분이 사라졌다. 하지만 제임스 본드가 화석이 될 운명을 막은 것은 다름아닌 테러리즘의 부각이었다.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이념적 대립을 통해 밥벌이하던 첩보물이 시대의 변화에 길을 잃고 헤맬때 그 어린양에게 구원을 준 것은 다름아닌 서구와 중동 혹은 제3진영의 테러리즘의 갈등고조였다.
가장 최근 개봉한 007의 20번째 씨리즈 '007 어나더데이(원제 - Die another day)'를 보더라도 그 변화는 확실해 보인다. 부시에 의해 악의 축으로 성명발표된 북한이 표적이 된 이 작품에서 007이 겨냥하고 있는 먹잇감의 성질은 확실해진것이다. 이념적인 대립이라는 솔직한 명분론은 평화의 수호라는 대의적 자세로 대체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007요원의 국적은 영국이라는 것이다. 대세는 미국이 쥐고 있는 흐름안에서 영국요원의 활약이 전면에 배치되는 이 시리즈물은 그 국면과는 다른 묘한 영화만의 그것이 된다.
1963년 5월 8일 '007 살인번호(Dr. No)'로 시작한 이 장대한 시리즈는 이번작품으로 21번째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그 와중에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배우만 6명째다. 제임스 본드라는 이름은 마치 007이라는 코드네임명-00은 살인이 허가되는 요원의 특별한 면허번호다.-과도 같이 배우에 한정되는 이름이 아닌 영화자체로 허락되는 계보와도 같다. 이는 '미션 임파서블'의 이단이 톰 크루즈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와는 다른 장점이다. 왜냐하면 톰 크루즈가 아닌 이단은 상상할 수 없고 그런 그가 등장하지 않는 '미션 임파서블'은 쉽게 상상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미션 임파서블은 시리즈로써 시간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007은 다르다. 언제든 제임스 본드에 걸맞는 배우만 발탁해내면 요원의 임무는 주어지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이 영화의 하이브리드적인 적응력의 장점이다.
어쨌든 새로운 시리즈물은 지금까지 007시리즈가 그 명맥의 유지라는 위안적 금자탑과는 다른 가치를 지닌다. 이는 21세기에 들어 고전적 답습으로 치부되며 이 시리즈가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의문을 불식시키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시리즈의 화려한 부활. 이번 21번째 시리즈는 그 끝에 따라붙는 1이라는 숫자에 염두를 두어도 될 것 같다.
일단 그 새로운 방점에 주인공인 다니엘 크레이그는 기존의 제임스 본드와는 다른 와일드함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무대포같은 직설적 성향에 탄탄한 근육에 얹혀진 다혈질성 체구. 이는 젠틀하고 세련된 여유안에서 작전을 유유히 성공시켜 나가던 기존의 제임스 본드들과는 차별적인 조건이자 지극히 이 시리즈만의 온건한 특색이다. 사실 그는 젊은 시절의 숀코네리가 연기한 제임스 본드와도 흡사한데 어쩌면 이는 새로운 시리즈를 다지려는 007의 의지를 훔쳐보는 면모로도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영화에서 그는 시작부터 능숙한 요원이 아니다. 007이라는 면허를 취득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고 그는 이 영화로 첫 임무의 신고식을 치룬다. 블록버스터로써의 신고식은 이미 피어스 브로스넌 세대의 시리즈가 완성시켰으니 이제는 블록버스터로써의 상품가치 이상의 네임밸류를 쌓아야 한다는 압박감을 제작진은 잘 이해한 것 같다. 시대착오적 발상과도 같은 007이 21세기에 살아남는 법에 대한 구상. 아무래도 이 영화는 그런 측면에서 꽤나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흑백으로 처리된 오프닝씬은 과거의 영광에 대한 오마쥬이자 새로운 시리즈로써의 포문과도 같다. 이제 007의 세계에 첫발을 딛는 6대 제임스 본드와 이 시리즈에 새로운 페르소나로 부임한 다니엘 크레이그 양쪽을 관객에게 확실히 각인시키는 작업. 이는 관객에게 새로 시작할 시리즈에 대한 노골적인 선전포고다. 새로 진행되는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것은 단순히 일발적인 시리즈의 추가가 아닌 지속적인 프로젝트의 유지라는 것.
오프닝의 화려한 크레딧이후로 펼쳐지는 추격씬의 스피디한 활극은 스타일리쉬함보다도 육감적인 배우의 외모만큼이나 액션의 비중을 감도있는 비중으로 다룬다. 마치 동물적인 눈빛의 제임스 본드에 대한 확실한 어필. 고급 장비의 럭셔리함과 지적인 두뇌로 세련된 대처능력을 보이던 피어스 브로스넌의 제임스 본드와도 극명하게 차별되는 새로운 본드는 영화에서도 언급되듯 악동의 이미지를 지닌다. 성숙되지 못한 유아적 도발성. 실제로 그는 극중 자신의 성미를 참지 못하는 다혈질적 대처를 몇번 보인다. 이는 새로운 본드의 매력이자 이 영화가 다른 시리즈물과는 다르게 비영화적인 매력을 획득하는 차이점으로 이해된다.
무엇보다도 이번 영화가 시리즈로써의 새로운 전환점임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것은 결말부분의 확실한 태도에 있다. 새로운 본드에게 퇴직의 꿈을 품게 하는 로맨스의 환타지가 비극으로 점철되는 순간 본드의 역할 수행은 재개된다. 더욱이 그의 독자적인 미션의 중도에서 마감되는 엔딩은 시리즈의 추가가 결정적임을 거리낌없이 드러낸다. 새로운 본드를 내세우며 새로운 시리즈로써의 확장과 전작들의 굳은 이미지 탈피를 노리는 이번 작품은 꽤나 성공적이다.
거대 자본이 투입된 것이 명백한 할리웃의 블록버스터로써의 규모나 스케일과 기술력이 탄탄한 액션의 쾌감은 굳히 설명할 필요가 없는 클리셰다. 오락성의 면은 그 배경안에서 확실히 보장되는 측면이다.
새로 돌아온 제임스 본드의 007미션은 007의 오랜 팬이나 새로운 시대안에서 과거의 영광을 기억못하는 세대들의 입맛에 적합한 모양새다. 무엇보다도 기술과 심리로 빚어내는 영민함과 근육질의 체력에서 뿜어져나오는 강인한 기운이 동반되는 새로운 도약은 성공적이다. 007이 지닐만한 그 기대감의 크기에서 전혀 무색하지 않은 이 작품은 앞으로 이어질 새로운 역할의 수행까지도 기대하게 만드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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