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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밟고 서 있는 것들에 관하여 오래된 정원
kharismania 2006-12-19 오전 4:35:16 2335   [5]

사실 필자는 학창시절을 광주에서 보냈다. 어린 시절 해마다 오월이 되면 광주에는 최루탄 냄새가 코를 찔렀고 여기저기 5.18에 대한 규탄 시위가 열리곤 했다. 특히 대학가와 시내부근에서는 시위하는 학생들과 진압하는 전경들간의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져 그 쪽으로 나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리고 5.18에 희생당한 시민들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사진찍혀 게시된 벽보는 정말이지 무시무시하게 끔찍했다. 마치 탱크라도 밟고 지나간 것인가 싶을 정도로 형체를 알 수 없게 뭉개진 얼굴들. 그 시절의 참혹했던 비인간적인 시절의 추억은 필자의 간접경험으로 그렇게 각인되었다. 직접 겪지 못했지만 그 사진만으로도 그 시절의 아픔이 전이되어 영문모를 억울한 분노가 젊은날의 치기처럼 솟아올랐다.

 

 사회주의자와 현실주의자의 로맨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의 사랑은 분명 진통을 겪을 수 밖에 없다는 태도를 분명히 하는 것만 같다. 황석영의 99년작 '오래된 정원'을 제목 그대로 영화화한 이 작품은 그 로맨스를 활자에서 이미지로 옮겨간다. 그 과정에서 캐릭터의 변화도 있고 축약된 내용도 있으며 영화만의 추가적 설정도 존재한다.

 

 박정희의 오랜 유신독재가 한발의 총성으로 끝나고 그 자리를 메꾼것은 전두환의 군사정권이다. '그 때 그 사람들'로 하나의 알력같은 시대가 끝나는 도발적인 상황을 유희적인 태도로 비추던 임상수 감독은 그 시대의 다음단계로 시선을 돌린 것만 같다. 이 영화는 격동의 80년대에 존재했던 로맨스를 조명한다. 아팠던 시절. 사랑한다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웠던 시절. 행복하다는 것이 미안했던 시절. 그시절에 어울리지 않을법한 간절한 그 사연을 말이다.

 

 감방안에 있던 한 사내는 슬슬 무언가를 준비한다. 세수를 하고 거울로 얼굴을 비추고. 이 남자는 17여년만에 드디어 출옥을 한다.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17년일까. 그를 내보내는 길을 함께하는 교도관은 그에게 17년이라는 세월동안 세상이 많이 변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변화에 대한 공적 일부가 어쩌면 그에게도 있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이 남자가 17년동안 감옥에 있었던 이유는 거짓같은 시절에 반대했기 때문이고 올바르다고 믿는 신념을 외쳤기 때문이다. 그 남자가 자신의 떳떳한 신념탓에 옥살이를 하는 동안 세상은 그 덕분일지 혹은 그와 무관함일지도 모르게 변하고 흘러가버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변한건 비단 세상의 정경과 자유의 속박뿐만이 아니다. 사랑이 죽었다. 그가 사랑하던 여자 한윤희(염정아 역)가 죽어버렸다. 현우(지진희 역)는 그렇게 세상과 마주하는 순간 자신의 기억안에서 서서히 침전해가던 17여년전의 사랑이 확실히 매듭지어짐으로써 다시 강렬하게 각인되는 것을 느껴야만 한다.

 

 17여년전 군부독재에 항거하다 악랄사범으로 찍혀 간첩으로 모함을 받으며 수배당하는 현우는 자신의 도바리 생활을 도와줄 조력자를 찾는다. 그리고 윤희와 현우는 그렇게 인연을 맺는다. '나 사실은 사회주의자에요.'라고 말하는 현우에게 '그래요?'라며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윤희의 사이에 이념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와 그녀가 공존하고 있는 갈뫼밭은 이념이 득실거리는 세상과는 다른 차원의 낙원이다. 그들은 그렇게 그안에서 사랑을 키워나가고 자신들만의 둥지를 튼다. 하지만 현우에게 그 낙원은 편치만은 않다. 자신과 뜻을 함께 했던 동지들은 죄다 끌려가 고문당하다가 넋이 나가기도 하는 판국에 자신만 그렇게 숨어서 지내기에는 그 갈뫼는 지독하게 평온하다. 하늘의 수많은 별들조차도 부끄러울 정도로. 그래서 현우는 그곳을 떠난다. 재워주고 먹여주고 숨겨주고 몸까지 주는 윤희를 떠나 그렇게 바보처럼 떠나간다.

 

 17년의 세월을 기준으로 두 남녀의 사랑은 과거와 현재를 옮겨다니며 이전과 이후를 보여준다. 갈뫼에서의 동거생활. 그 이후 현우가 수감된 후 홀로 세상에 남겨진 윤희. 출옥 후 세상과 대면하는 현우의 모습. 둘에서 각자 하나의 모습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사랑의 절실함이 세월이 만들어낸 진통에 연대해야만 했던 시절의 아픔을 드러낸다. 시대를 외면할 수 없던 행동주의적 신념을 지닌 현우와 자신을 포기할 수 없는 자기방어적 신념을 지닌 윤희는 그렇게 교도소 담 하나사이로 다른 세상에 귀속된 채 살아간다.

 

 현우가 대면하는 것은 비단 연인의 빈자리만이 아니다. 어머니는 17여년의 세월동안 땅투기로 재미를 본 재력가가 되어있다. 그와 뜻을 함께 했던 그 시절의 민주화 투사들은 모두 17년이란 세월에 떠밀려 그 시절과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유물론자라며 마르크스 운운하는 이는 고문으로 습관적인 안면 경련을 일으키며 타인이 보기에 무능력자로 취급당할정도로 비루하게 살아가고 다른 누구는 자본주의가가 되어 유능하게 살아간다. 그들은 서로 변절자와 시대착오자라며 삿대질하지만 이미 과거에서 하나의 의미를 품었던 이들이 시대뒤로 밀려나 각자의 삶안에서 방관되듯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시대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피땀흘려 이뤘다고 믿는 자유 역시 그 본질과는 무관하게 어그러진 질서 안에서 자본으로 인한 모순을 낳는다. 오히려 이념보다도 더욱 은밀하게.

 

 과연 그 신념을 통해 개인을 희생했던 시절의 아픔이 오늘을 만든 것일까. 혹은 단지 시간이 흐름이 그 과정과는 무관하게 과거를 모순으로부터 해방시킨것일까. 개인과 시대는 과연 어떤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마주보고 걸어가는 것일까. 자신만 편하게 안주할 수 없다는 현우의 신념적 행동은 과연 이 사회를 바꾸는 힘이 된 것 일까. 시대에 개인을 내던지는 것은 낭비와도 같은 일이라는 윤희의 말은 이기적인 개인주의인가. 사실 영화는 그 어느 쪽에도 무게를 실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이 옳고 그르다를 분명히 하기에는 불확실한 가치들이기 떄문이다. 특히나 80년대의 그 시절, 지금에 와서야 그것이 옳거나 옳지 않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지만 그 시절안에서 그것이 옳고 그르다고 말하는게 쉽지 않았던 시절에서는 말이다.

 

 시대의 폭력앞에서 비겁해져야만 하는 개인을 탓할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 시절 자유를 위해 몸던져 희생한 투사들을 영웅대접하며 사는 것도 아니다. 과연 우리가 그시절안에서 그 시절을 말한다면 과연 우리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우리는 비겁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혹은 아무렇지 않게 방관할 수 있는 뻔뻔함이 있었을까. 결국 그것은 개인이 정하는 정답들이다. 단지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했느냐에 대한 물음이 그 정답의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올바른 기준이 될 것이다.

 

 어떤 신념을 지니고 어떤 행위를 하든 결국 그에 대한 대가도 결과도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신념을 지킨 댓가로 사랑을 잃어야 했던 현우처럼. 영화가 보여주는 진정성의 의미는 그 부분에 있다. 무언가를 선택해야만 했던 시절. 그 시절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노선을 택해야 했던 시절. 출옥해서 오랜만에 친구와 만나는 현우에게 한 친구가 묻는다. '넌 아직 노선이 있냐?' 더이상 노선이 필요없는 시대에서 현우는 살아가야 한다. 그가 신봉하던 사회주의는 오래전 착각과도 같은 오류로 판명되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춰가고 있고 그가 부르짖던 자유는 자신들의 노고따윈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듯이 무가치한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 시절의 아픔앞에서 몸을 내던졌던 이들의 수고는 그들만의 수고로 간직되고 돌이킬 수 없는 시대의 몰염치함에 간과되는 희생으로 이해되기만 한다.

 

 시대라는 비극안에서 몰락하는 개인성. 개인의 고고한 가치를 위해 노력했던 이들의 흔적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들의 흔적은 마치 5.18 민주화운동희생자들의 묘비처럼 무색하게 변두리의 상징으로 채워지고만 있지 않은가.

 

 현우는 자신의 오래된 정원을 찾는다. 그 갈뫼밭에서 그녀의 흔적을 느끼고 자신과 그녀와의 소중한 추억들을 다시 되짚는다. 오래된 정원은 결국 그 갈뫼밭이자 그들이 원하는 유토피아와도 같은 공간이다. 이념을 떠나 사랑이 존재했던 곳. 시대라는 외압으로부터 달아나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곳. 그 갈뫼밭에서 사랑했던 기억들은 그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을 일시적으로 충만할 수 있었던 환각과도 같다. 그래서 현우는 그곳에서 다시 달아났을 것이다. 자신의 중요한 신념을 위해서 사랑으로부터 달아났을 것이다. 그때는 그것이 그리도 중요했으니까. 17여년 후 그것을 눈물나게 그리워할줄은 몰랐으니까. 인생은 길고 역사는 더 길다는 윤희의 말처럼 그렇게 우리는 그 흐르는 시간속에서 미래에는 잊혀져가는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단지 그 한점같은 세월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떄론 자신의 삶이 절실해지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현우가 사랑보다도 신념을 택했던 것이기도 하다.

 

 윤희는 영작(윤희석 역)을 통해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시대에 대한 반항을 이루고자 한다. 마치 운동권안에서 자의가 아닌 타의에 떠밀려가듯 총대맬것을 강요당하는 영작에게 그녀는 그에 동참하지 않을 것을 권고한다. 자신이 겪었던 개인의 희생의 불가치함에 그가 동참하지 않기를 갈망한다. 시대에 의해 사랑을 제물로 바쳐야 했던 그녀는 시대가 요구하는 제물을 뺴앗음으로써 그에 복수하고자 한다. 그리고 은결(이은성 역)은 그 시대와는 무관한 이후 세대에 대한 화합적 모색과도 같다. 은결의 존재로부터 미소를 짓는 현우의 모습은 그 격동의 세대들이 자신들이 완성시켰다고 '믿는' 오늘의 자유를 누리는 다음 세대들에게 자신들의 행위를 보상받고자 하는 것이 아닌 그들이 누리는 자유자체로 보상받았음을 의미한다.

 

 그 오래된 정원에서 그들은 그렇게 사랑을 했다. 시대의 강요가 무색할만큼 그들은 그렇게 사랑을 했다. 사회주의자도 현실주의자도 자신의 노선따위는 무색해질 정도로 그 세월안에서 도망치듯 혹은 뻔뻔하게 반항하듯 그들은 사랑을 했다. 그래서 그 사랑은 아름답고 한편으로 서글프다. 그 시대를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아픔을 견뎌야 했던 그 세대만의 사연앞에서 그 고통을 밟고 오늘날의 자유위에 서있는 우리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가. 물론 그것은 간단하다. 현우과 은결처럼 우리도 그저 서로를 인정하면 된다. 그 시절이 있었다는 것. 그안에서 우리가 서로 다른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시절이 존재했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그 슬픈 넋들이 살았던 시대를 추도하는 것 아닐까.

                  -written by kharismania-


(총 0명 참여)
ann33
잘읽었습니다.   
2006-12-19 21: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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