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007 시리즈에 그렇게 큰 애정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 캐릭터에 애정을 갖는 분들도 매우 많겠지만, 개인적으로 나에게는 그렇게 호감 가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아무리 거친 액션신들을 소화해도 늘 신사적인 면모를 보여서 멋있게는 보일지라도 인간미는 좀 덜하게 보였고, 늘 여자들을 밝히는 모습도 그저 기계적으로 보여 인간미가 잘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피어스 브로스넌 특유의 다소 기름기 있는 이미지가 그런 제임스 본드의 캐릭터와 어느 정도 매치가 되어 다가온 게 사실이고.
그래서 그런지, 새로운 모습의 제임스 본드가 출연하는 이번 <카지노 로얄>은 상대적으로 기대가 컸다. 피어스 브로스넌의 바통을 이어받은 6대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는 생김새에서부터 이전에 생각했던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가 풍기는 분위기와는 완전히 달랐다. 기름기는 빠진 듯하면서도 차가운 듯 뭔가 끓어오르는 기운을 소유한 사람이라고나 할까. 뭔가 다른 제임스 본드가 될 것 같다는 기대에 이번 <카지노 로얄>에는 유독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았나 싶다. 그리하여 보게 된 결과, 확실히 그는 달라졌다. 아니, 원래대로 돌아갔다고 해야 할까.
영국 비밀 첩보기관 M16으로부터 두 번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뒤 살인면허를 지닌 최고의 요원의 의미를 지니는 암호명 "00"을 받게 된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 암호명 007로서 마다가스카에서 테러리스트를 감시하는 임무를 처음으로 부여받게 되지만, 상부의 명령과는 상관없이 자기 내키는대로 해치우는 본드의 성격에 M(주디 덴치)은 아주 치가 떨리기 직전이다. M의 명령과는 상관없이 본드는 독자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데, 이 테러리스트의 배후에 있는 드미트리오스라는 자를 쫓기 위해 바하마로 향한다. 그곳에서 드미트리오스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의 아내인 솔랜지(카테리나 뮤리노)를 유혹하고, 성공적으로 드미트리오스에게 접근한 본드는 국제적인 테러 세력들의 자금을 굴리고 있는 르쉬프(매즈 미켈슨)라는 자가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르쉬프가 몬테네그로의 카지노 로얄이란 도박장에서 자금을 모은다는 정보를 입수한 본드는 르쉬프와의 대결을 통해 그가 딸 돈을 가로채라는 M의 지시에 따라 자금을 대줄 재무부 요원 베스퍼 린드(에바 그린)와 함께 몬테네그로로 향한다. 눈치 9단인 르쉬프와의 대결 속에서 본드와 베스퍼는 수차례 위기 상황을 겪고,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애틋한 감정을 갖게 되는데.
제작자 측에서 차기 제임스 본드로 이전에 이 역을 맡아왔던 숱한 배우들과 유사한 이미지가 아닌, 기존의 제임스 본드 영화 팬이라면 충분히 에러라고 할 만한 전혀 다른 이미지의 다니엘 크레이그를 캐스팅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영화 속 제임스 본드는 지금까지 숱하게 봐 왔던, 신사적이면서 냉철하고 여자들에겐 능글맞은 제임스 본드가 아니었다. 첫 장면부터가 몸소 보여주고 있다. 제임스 본드는 이전 작품들에서처럼 대규모의 탈 것으로 시원스럽고 장대한 액션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화장실에서 일대일로 대단히 깔끔하지 못한 맨주먹 싸움을 펼친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적어도 이 영화 속 제임스 본드는 멋으로 무장한 캐릭터가 아님을 항변한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연기는 그런 점에서 색다르면서도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시도 때도 없이 뛰어다니고(그것도 실제 육상선수인 배우를 쫓기까지 하면서), 자기 성질을 못이겨 충동적으로 큰일을 벌이기까지 하고, 사랑의 감정에 망설임 없이 자신을 내던지는, 다소 거칠고 무모해 보이면서도 본능에 충실한 면모는 다분히 감정적으로 변한 제임스 본드의 캐릭터에 색다른 매력을 느끼게 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적인 면모도 보이게 한다. 이전 제임스 본드였던 피어스 브로스넌의 침착하고 서글서글한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냉정한 듯하면서도 심적으로 뭔가 적극적으로 끓어오르는 감정의 폭을 소유한 듯한 그의 모습은 이전엔 미처 알지 못했던 제임스 본드의 새로운 성격들과 어우러지면서 분명한 개성을 지닌 매력을 발산한다.
이번 영화의 본드걸이라 할 수 있는 베스퍼 린드 역의 에바 그린의 연기 역시 인상적이었다. 전형적인 서양 미인이라고 하기에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그녀의 외모와 나긋나긋한 듯 냉철한 말과 행동은 본드걸로서의 이미지 또한 한층 색다른 것으로 바꿔놓았다. 단지 제임스 본드 옆에서 장식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닌, 독자적인 매력과 카리스마로 만만치 않은 비중을 차지하면서 제임스 본드와 함께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극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는 우수에 찬 눈빛에서부터 이전의 본드걸 이미지에선 상상하기 힘들었던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이라는 이미지까지 꽤나 자연스럽게 남았다.(실제로 그런 인물이 되기도 하고) 이건 사족이지만, 개인적으론 진하게 화장한 모습보다는 화장실에서 맨얼굴인 채로 있는 모습에서 더 숨이 멎을 뻔했다.
행동도 감정도 한층 격해진 다니엘 크레이그의 연기, 나아가 제임스 본드의 성격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가장중요한 것일는지 모른다. 누차 강조하지만 이 영화 속 제임스 본드는 기존에 봐 왔던 그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배경은 2006년이나 본드가 갓 "007"이라는 암호명을 단 이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의 성격이 "달라졌다"기보다는 "원래 이랬다"고 해야지 옳을 것이다. 늘 신사답고 깔끔한 이미지로 박혀 있었던 제임스 본드라는 인간이 사실은 이렇게 정제되지 않은 면모를 갖고 있었음을 영화는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걸맞게 액션신들도 거의 SF영화와 맞먹었던 <어나더데이>와는 다르게 아날로그 액션들로 가득차 있다. 본드는 온몸이 긁히고 더러워진 채 대책없이 뛰어다니고, 마치 성룡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위험천만한 크레인 위에서 맨몸액션을 보이기도 한다. 시대는 2006년이거늘 그가 갖고 있는 첨단장비란 기껏해야 휴대전화나 차에 구비된 응급장비 정도. 나머지 임무수행 때 그는 오로지 총과 맨몸으로 승부할 뿐이다. 아, 제목과 내용에 걸맞게 카드게임 장면도 다수 등장한다. 처음엔 카드게임의 규칙을 확실히 알 수 없어 다소 어리둥절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보다보면 침묵 속에서 거액을 놓고 펼쳐지는 두뇌게임을 보는 재미가 꽤나 쏠쏠해진다. 다만 예고편에서와는 달리 대규모 액션 장면은 생각보다 비중이 많지 않고, 오히려 카드게임 장면이 생각보다 비중이 커서 자칫 2시간 반의 러닝타임이 조금 늘어지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렇게 액션 장면들에 있어서도 디지털보다 아날로그가 부각되어 있듯이, 본드의 성격도 보기 좋게 갈고 닦여 있지 않다. 늘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다녀서 상관 M조차도 그냥 잡아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하고, 르쉬프를 잡기 위해 카지노 로얄에서 카드게임을 펼치는 것도 나중엔 그를 잡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잃은 돈을 되찾기 위한 오기가 더 크게 작용할 만큼, 그는 냉철하지 못하고 끓어오르는 본능에 그저 휩쓸려가는 인물이다. 그래서 자기 분노에 못이겨 늘 격한 액션을 펼치고, 더 무모한 시도를 벌이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위험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휩쓸려 가기 때문에 나약한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전 영화들에선 거의 항상 여자를 그저 액세서리처럼 끼고 다니던 그가 이 영화에선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에 휩쓸리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물론, 처음에 베스퍼 린드가 알아챌 만큼 여자를 단순한 쾌락의 수단으로 여기는 그의 남성우월적인 면은 어느 정도 갖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을 절묘하게 꿰뚫고 있고, 냉정하면서도 한편으론 보호해주고 싶을 만큼 여린 그녀의 모습에 끌리게 되면서 본드는 베스퍼를 단순히 도우미나 액세서리로 여기지 않고 진정 지켜주고 함께 하고 싶은 사랑으로서의 감정을 키우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잘 제어하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 속에서, 사랑 또한 무모하다 할 만큼 불같이 키워가는 것이다. 샤워실 안에서 불안에 떠는 베스퍼를 따스하게 안아주며 기대게 하고, 그런 베스퍼 때문에 자신의 일에 회의감마저 느끼는 본드의 모습은, 이전에는 거의 볼 수 없었을 이런 순정파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본드의 불같은 면모는 갈수록 사건을 비극적으로 몰고 간다. 불완전한 임무의 수행, 사랑했던 여인의 배신과 파국은 불같이 달려들던 본드의 심리를 패닉상태로 몰고 간다. 특히나 임무수행 못지 않게(어쩌면 그 이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베스퍼 린드와의 관계는 본드가 마음가짐을 바꾸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지 않나 싶다. 모든 임무를 완수하고 단 둘이 휴가를 떠나 꿈같은 나날을 보내지만, 본드는 그 후에 뒤늦게 베스퍼의 배신에 대한 충격적인 진실과 맞닥뜨린다. 그리고 그런 예기치 못한 상황의 전환 속에서 두 사람의 사랑은 파국으로 치닫고, 그 속에서 본드는 결국 크나큰 마음의 상처를 입고 만다. 힘껏 자신을 내던진 사랑에 제대로 베이고 만 그는,이 휴가를 통해 공식적으로 사표를 내고 요원직을 그만두려 했던 마음도 접은 채 다시 MI6로 돌아간다. 언제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표정엔 일체의 감정을 싣지 않은 채.
이를 통해 영화는 이 영화에서 본드의 성격이 변한 것이 아니라, 원래 이랬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도 처음부터 냉철하고 신사적인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충동적이고 무모하고 로맨티스트적인 면모도 갖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결국 걷잡을 수 없는 상처를 낳았고, 결국 그는 자신을 보다 강하게 만들고자, 깊게 남은 상처를 숨기고자 그렇게 변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려 최대한 냉철하고 신사적으로 행동하고, 또 한번 가슴에 쓴 상처를 남기지 않기 위해 여자와 즐기되 사랑은 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음을 말이다. 이런 한바탕 풍파를 겪고 난 뒤에야 그는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 대사, 신사적이면서도 극도로 사무적인 "본드, 제임스 본드"라는 자기 소개 멘트를 그의 첩보요원 경력 사상 처음으로 날린다. 이 때서야 비로소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제임스 본드"가 되는 것이다.
예의 007 시리즈처럼 악당이 등장하고 그와의 대결도 등장하긴 하지만, 생각보다 이 대결의 결말도 임팩트가 강하지 못하고 싱겁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본드가 원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원래 제임스 본드의 모습은 이랬다는 것이다. 이미 대다수 사람들의 머리 속에 "여자 밝히는 만능요원" 정도의 이미지로 각인된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가 실은 그런 캐릭터가 아니었다는 것. 생각보다 더 뜨겁고 인간적인 인물이었고, 그래서 큰 상처를 입었고, 그래서 그걸 가리고 더 단련하기 위해 지금의 이미지로 변했다는 것이 이 영화가 얘기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가 생각보다 꽤나 불쌍한 존재였음을 얘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의 숨은 매력에 눈을 뜨게 하는 인상적인 영화임에 틀림없다. 제임스 본드에 별 관심없던 나도 이 영화 덕분에 제임스 본드에 보다 관심어린 시선을 보낼 가능성을 더 열어두게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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