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차의 맛] 이런 게 녹차의 맛인가????
하지메는 짝사랑하던 여학생이 전학을 가자 떠나는 기차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며 자신을 책망한다. 어차피 그 여학생이 계속 있는다고 해도 고백 조차 못했을텐데..... 무심히 떠나는 기차가 하지메의 이마를 관통하는 약간은 어설픈 CG로 영화가 시작될 때 그다지 평범한 영화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기대에 부응하게, 이 기기묘묘한 가족의 조화는 엉뚱하고 독특하면서도 따뜻하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자신만의 골방에 사는 할아버지는 사실은 유명한 만화가였다. 할아버지는 며느리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갖가지 기묘한 포즈를 취해주고 우두커니 앉아있는 손녀를 향해 끊임 없이 재미 없는 장난을 걸고, 며느리보고 우산을 들고 걸어와보라고 시키는 등 정말 만화같은 아주 득특한 캐릭터다. 물론 계속되는 현실과 유리된 엉뚱한 행동은 보는 사람들을 상당히 불편하게 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모든 가족을 유심히 관찰하는 할아버지의 애정은 결국 이 영화의 피날레를 기막히게 장식한다.
엄마는 살림하는 틈틈이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애니메이터로 재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고, 아들 하지메는 짝사랑하던 소녀가 떠나자마자 새로 전학온 여학생에게 마음을 뺏겨 새로운 짝사랑을 시작했지만, 말 한 번 걸지 못하고 있다. 어린 딸 사치코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커다란 자신의 환영을 어떻게 하면 떼어버릴까 고민 중이고, 잠깐 고향집에 내려온 삼촌은 예전에 사랑했던 여자의 결혼 소식에 씁쓸해 한다.
이 영화는 특별한 사건도 없이 꽤 긴 시간(143분) 동안 상영된다. 그러면서 보는 사람의 궁금증을 자아낼 만한 사건은 딸 사치코가 철봉 거꾸로 돌기에 성공해 자신의 환영을 떠나보낼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아들 하지메는 새로 전학온 여학생과 둘 만의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인지, 대략 이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다보니 득특한 상상력이 중간중간 채색되어 있다 해도 조금은 지루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런 지루한 맛이 혹시 녹차의 맛?? 지금이야 녹차하면 다이어트의 상징처럼 되버리면서 전지현 등 젊은 여성 톱스타가 연상되기도 하지만, 어릴 때 처음 맛본 녹차맛은 떨떠름하니 지루한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떨때는 의미 없어 보이는 장면(상상력을 실험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들로 인해 조금은 삐걱대던 영화는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가족들이 할아버지의 골방을 찾으면서 '녹차의 맛'이라는 제목처럼 정말 화려하지는 않지만 화사하게 빛을 발한다. 가족들은 할아버지가 쓰던 그 골방에서 표지에 가족의 이름이 적혀 있는 그림책 네 권을 발견한다. 아버지의 그림책에는 어릴 때 운동회에서 이어달리기를 하다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나 달리는 모습이, 며느리의 그림책에는 우산을 들고 걸어오는 모습, 손자의 그림책에는 위태롭게 자전거를 타고 오는 모습, 손녀의 그림책에는 철봉 거꾸로 오르기에 성공하는 모습이 책장을 쭉 넘기면 움직이도록 그려져 있었다. 아마도 할아버지가 남긴 이 수채화와 같은 느낌이 특별하지는 않아도 깊게 남아 있는 녹차의 맛이리라. 손녀 사치코는 할아버지가 남긴 그림대로 철봉 오르기에 성공하고 자신의 거대한 환영을 하늘로 올려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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