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오묘함이란 실생활에서 한두번 겪는 게 아니다. 학교 수업 시간에 졸기 전엔 분명히 칠판이 텅 비어 있었는데 눈 한번 감았다 뜨니까 칠판이 글씨로 꽉 차 있더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는만큼, 우리가 시간의 흐름에 대해 몸으로 느끼고 있는 묘한 상대성이란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다. 우리는 늘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된다면서 이런 시간의 오묘한 상대성을 개개인의 심리상태의 차이 때문이라고 돌려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혹시 알겠는가, 진짜 시간이 이런 장난을 우리에게 치고 있는 것일지.
'데자뷰', 한자어로 '기시감'(이미 기, 볼 시, 느낄 감 - 이미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라는 현상도 이런 시간의 장난 중 하나이다. 분명 처음 겪는 일인데 이미 한번 겪어 본 듯한 소름끼치는 느낌. 우리는 이 현상을 여전히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난해한 미스터리라면서 한쪽으로 치워두고 있지만, 이 역시도 자유자재의 형체를 지닌 시간이라는 놈이 저지르고 다니는 짖궃은 장난일지도 모른다. 이런 비과학적인 현상을 <데자뷰>는 꽤나 과학적인 방법으로 건드린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드는 느낌은 여전히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하기 이를데 없는 그 느낌이다.
뉴올리언즈의 알제 부두에서 대규모 페리 폭발 사고가 일어나고, 수백명이 목숨을 잃는 참혹한 결과를 불러온다. 우발적인 폭발 사고인지 의도된 테러인지를 규명하던 와중에 ATF(화기, 담배, 주류 단속국) 요원인 더그 칼린(덴젤 워싱턴)은 이 사건이 의도된 테러라는 것을 밝혀낸다. 그러던 중 부두 근처에서 불에 탄 듯한 여인의 시신이 발견된다. 그 여인의 이름은 클레어 쿠체버(폴라 패튼). 그런데 이 여인이 페리 폭발 사고 전에 이미 사망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이를 통해 이 여인이 페리 폭발 사고의 결정적 열쇠를 쥐고 있음이 밝혀진다. 클레어의 흔적을 쫓기로 결심한 더그는 흥미로운 장비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정확히 나흘 반 전의 과거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장치. 7개의 위성이 보내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나흘 반 전에 어떤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볼 수 있는 장치이다. 이를 이용해 더그는 참사의 범인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그러던 중 이 장치가 갖고 있는 상상도 못한 비밀이 드러난다.
연기파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지만 액션 영화에도 상당히 많이 출연한 덴젤 워싱턴은 이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연기가 되는 액션배우'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줄거리만 봐서는 대규모 재난을 한 사람이 바로 잡는다는 점에서 뻔한 영웅 영화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어깨에 힘은 빼고 고독함과 인간미가 함께 녹아든 자연스런 캐릭터를 보여준 덴젤 워싱턴의 연기가 이 영화를 뻔한 영웅 영화의 늪에서 구해낸 중요 요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활력 넘치면서도 따뜻한 그의 연기 덕에 영화에 좀 더 잘 몰입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이 배우를 누가 올해 우리 나이 54세의 배우로 보겠는가.
조연이라고 해야 옳겠지만 클레어 쿠체버 역의 폴라 패튼의 존재감도 인상적이었다. 더그의 도움을 받는 여성이지만 연약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소유한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냉혹한 살인마 캐롤 오스타트를 연기한 짐 카비젤의 살벌한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온화한 인상을 가지고 일체의 표정 변화 없이 방화와 살인을 저지르고 섬뜩한 말들을 뱉어내는 그의 모습은, 그가 이전에 예수를 연기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더욱 소름끼치게 느껴졌다.
만드는 영화마다 엄청난 때깔을 자랑하며 세련된 액션 영화의 대명사임을 과시했던 토니 스콧 감독의 실력은 이번 영화에서도 빛을 발한다. 배에 탄 이들의 평화로운 풍경과 뭔가 사건이 일어날 듯한 주차 갑판의 모습이 교차되다가 참사가 발생하는 오프닝부터 색감이 제대로 살아나는 화면을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제대로 몰입할 수 있게끔 만든다. 뿐만 아니라 시간을 넘나든다는 SF적인 소재를 지니고 있는 만큼 자동차 추격신과 같은 대규모 액션신도 마치 SF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시원시원하고 세련된 충돌 장면들을 통해 시각적 쾌감을 극대화시킨다. 또한 액션 영화로서 과분하다고까지 느껴질 만한 세련된 색감은 영화 속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또 다른 요소인 더그와 클레어의 묘한 감정을 보여주는 데에도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이 영화는 시원한 액션과 쫄깃한 스릴을 전해주는 철저한 헐리웃식 오락영화긴 하지만, 그전에 꽤나 복잡한 과학적 이론을 바닥에 깔고 있다기에 적잖이 걱정되기도 했었다. 그 과학적 이론때문에 오히려 영화에 잘 몰입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말이다. 하지만 막상 영화에 빠져드니 그런 걱정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물론 한 마디로는 설명하기 힘들 이론이 등장하긴 한다. 우주의 시공 구조가 왜곡됐을 때 '평행우주'가 우연히 교차하면서 시간을 넘나드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둥(내가 지금 이렇게 설명하는 것도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의 이론 말이다.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접어서 한 시점에서 다른 시점으로 확 건너 뛰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과학적으로 옳다고 증명된 이론은 아니다. (헐리웃 영화에서 과학적으로 오류가 없는 경우도 흔치 않다.) 때문에 '왜? 어떻게?'하고 따져들어가기 시작하면 한없이 머리가 복잡해진다. 따라서 난 영화를 볼 때에 이렇게 이론을 놓고 심각하게 따지는 건 애초에 포기했다. 단지 시공 구조가 왜곡되면서 시간을 접었다 폈다 접었다 폈다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말도 안되는 듯하지만 흥미로운 이론이 있다는 것만 알아두고 영화에 빠져드니, 세상에 이렇게 흥미로울 수가 없던 것이다. 말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누구나 혹할 만한 소재가 이런 시간 여행같은 소재 아니던가.
엄밀히 말해 미래를 배경으로 한 건 아닌 이 영화는 이런 독특한 이론을 보다 구체적인 여러 장비들을 통해서 영화 속에서 실현시킨다. 데이터를 구축하는 시간 관계 상 정확히 나흘 반 전의 과거만 볼 수 있다는 장비, 특정 장소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과 나흘 반 전에 일어났던 일을 함께 볼 수 있는 고글 등 관객들을 혹하게 만드는 장비들이 허무맹랑하지만 호기심을 맘껏 자극하는 재미를 선사한다. 중후반부로 가면서부터는 뻔한 시간 여행처럼 전개되기도 하지만, 그 후에도 우리가 생활 속에서 겪는 데자뷰 현상을 더그가 이전에 사용했던 시스템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모습이 퍼즐처럼 하나하나 맞춰져 가면서 상당한 긴장감을 제공한다.
영화 속에선 인위적으로 시간을 건너뛸 수 있는 효과를 만들기는 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데자뷰 현상을 겪는 더그를 보면서, 실제로 누구나 데자뷰 현상을 한번쯤 겪어봤을 관객들로 하여금 '그럴 듯한데?'하고 한번쯤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고민거리를 던져주기도 한다.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거야 매우 힘들겠지만,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번의 데자뷰 현상도 미래의 내가 혹은 과거의 내가 현재로 와서 무의식 중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 될 수 있지 않느냐며 천연덕스러운 설정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말도 안되는 듯 하지만 한번쯤 빠져볼 만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만큼, 기초하고 있는 이론의 논리적 근거를 떠나서 발칙한 상상의 현실화 정도로 넘기고 영화를 즐긴다면 관객의 두뇌를 맘껏 자극하며 상상력의 쾌감을 전달하는 영화의 미덕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묘한 여운을 남기는 결말은 어디까지나 관객의 생각에 맡기는 영화적인 상상력 덕분에,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의 상관관계에 있어서 상당한 생각의 여지와 논란을 남길 것으로 예상된다.
시간이란 본래 볼 수도, 만질 수도, 자를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시간을 숫자라는 수단을 통해 "보고", 시와 분과 초라는 단위를 통해 "자른다". 우리가 굳이 "지금부터 2007년이다!"라고 끝과 시작을 매듭짓지 않아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이렇게 형체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우리 모르게 겹치고, 접히고, 건너뛸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정말 중요한 일인데, 아무리 말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가요?"라고 묻자 "일단 말해야죠."라고 답하는 더그와 클레어의 대화처럼, 영화 속 이 기이한 현상들도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보장하기는 힘든, 일단 말해봐야 할 것같은 강력한 현상임엔 분명하다.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시간이란 놈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이 영화 <데자뷰>가 여느 액션 영화들처럼 스토리는 신경끄고 치고박고 부수는 데만 관심 있는 액션영화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쉽게 단정지을 수 있는 복잡미묘한 과학적 이론을 깔고 있고, 그것도 모자라 '운명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심오한 주제의 운명론까지 양념으로 치고 있는 영화라서, 영화를 보는 동안 눈으로 볼거리를 즐기는 것 외에 머리도 적잖이 써야 할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런 '머리쓰기'의 두려움이 앞서 이 영화가 선사하는 즐거운 상상을 포기한다면 그것 또한 매우 아까운 일이 될 것이다. 처음부터 영화의 이론을 따지고 들려 하지 마시라. 영화가 주는 이론을 걱정없이 일단 받아들인다면, 그 뒤로 펼쳐지는 '시간을 접었다 폈다 접었다 폈다' 하는 놀라운 마술에 제대로 빨려들 것이고, 당신의 두뇌는 굳이 애쓰지 않아도 활기차게 움직임을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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