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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다공증을 앓고 있는 황실 황후화
jimmani 2007-01-31 오후 12:22:44 1279   [7]

(스포일러 있습니다)

흔히들 말하기로 중국더러 "머리 수로 밀고 나간다"고 얘기를 한다. 전세계 인구의 20% 가까이를 차지하는 중국의 인구 수가 상상을 초월하는 건 사실이다. 중국의 인구 수를 둘러싸고 종종 듣게 되는 여러 속설들이 그저 허투루 들리지는 않는다. 오죽했으면 중국 사람들이 한날 한시에 똑같이 뛰면 지구의 궤도상의 위치가 바뀔 것이라는 얘기나, <삼국지>를 영화로 옮긴다면 <반지의 제왕>은 새발의 피가 될 것이라는 얘기 등 말이다.

지금은 예전보다 많이 약해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 어마어마한 인적 자원만 봐도 중국이란 나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잠재력을 가진 나라임은 분명하다. 더구나 옛날 옛적에는 전세계를 호령할 만큼 무지막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나라 아니던가. 영화 <황후花>는 이랬던 중국의 예전 모습, "황금기"라는 말조차 초라하게 느껴질 만큼 절정에 달하는 위용을 자랑했던 당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이렇게 찬란한 위용을 자랑했던 황실 속에 살았던 사람들은, 아니나다를까 참 초라하다.

당나라 말기, 황실에는 황제(주윤발)와 황후(공리), 그리고 세 아들 원상(리우 예), 원걸(주걸륜), 원성(준지 퀸)이 살고 있다. 최대 명절인 중양절의 축제를 앞두고 황제는 북쪽 국경 수비를 위해 길을 떠났던 둘째 아들 원걸을 궁으로 데려 오고, 오랜만에 가족 모두가 황실에 모이게 된다. 그런데 이들 사이의 분위기가 마냥 화기애애한 것만은 아니다. 갈수록 몸이 약해지는 황후. 몸이 약한 황후에게 황제는 예전부터 꾸준히 탕약을 권해왔는데, 언제부턴가 그 탕약에 치명적인 독이 있는 약재가 들어갔던 것이다. 거기다 화려한 황실 안에 도사리고 있는 충격적인 비밀들이 하나둘 씩 베일을 벗기 시작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황제에 대한 정은 사라진지 오래인 황후는 원걸과 함께 황실을 뒤엎을 반란을 중양절 밤에 치르기로 계획한다. 그리고, 황실의 운명이 송두리째 뒤바뀔 중양절 밤은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다.

시각적으로 압도하는 스펙터클한 화면을 논하기 전에, 배우들의 카리스마의 스펙터클함부터 논하겠다. 21세기형 무협 블럭버스터의 신호탄이었던 <와호장룡>에서 다시금 무협 블럭버스터로 돌아온 주윤발과, <인생> 이후 실로 오랜만에 장이모우 감독과 만난 공리의 카리스마는 그저 입이 떡 벌어질 뿐이다. 많은 대사 없이 황제의 위엄을 잔뜩 담은 표정과 묵직하면서도 빈틈없으며 아름답기까지 한 움직임으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이 거대한 나라의 황제임을 드러내는 주윤발의 카리스마는 극중에서 늘 아버지에게 별말 못하며 굽신거리는 세 아들의 처지가 충분히 이해될 정도로 그 무게감이 대단했다. 생명의 위협 앞에서 모반을 계획하는 팜므 파탈을 연기한 공리 또한 강인함과 도도함이 한껏 묻어나는 표정과 몸짓에서 전혀 딸리지 않는 강렬한 존재감으로 영화를 든든하게 받쳐준다.
이 두 "명품배우"들의 카리스마가 워낙에 강하다보니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의 세 아들이 풍기는 포스는 상대적으로 많이 약한 것이 사실이다. 주윤발, 공리 다음으로 이름이 올라간 둘째 아들 원걸 역의 주걸륜도 기대했던 것보다는 인물의 존재감이 많이 떨어지는 듯했다. 단지 황후의 반란에 가담하고, 후반부 대규모 전투신에서 나름 활약을 보여주는 것 이외에 극을 장악할 만한 무게감 있는 분위기는 좀 부족했다. 오히려 그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배우지만 첫째 아들 원상 역의 리우 예의 연기가 더 인상적이었다. 황실 내 위험한 관계의 한복판에 서 있는 이 사람의 모습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관계에 기꺼이 끼어드는 만큼 대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단히 심약한 면모도 갖추고 있는데, 리우 예는 이런 첫째 아들의 대담한 듯 나약한 면모를 훌륭히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이제 비주얼을 논할 차례다. 이제까지 나온 "무협 블럭버스터"들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규모의 제작비를 쏟아 부은 이 영화는 그 많은 제작비에 걸맞게 영화 내내 수수한 화면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하다못해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까지도 형형색색 화려한 색깔들의 문양들이 뒤덮고 있는 궁내, 축구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궁 앞마당을 빈틈없이 차지하고 있는 노란색의 국화들, 입고 있는 사람을 보는 내가 더 걱정이 될 만큼 육중하고 화려한 금빛 액세서리들로 치장된 황족의 의상들까지, 너무 사치를 부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의상, 미술 등의 시각적 요소들은 화려함의 최절정을 달린다. 비단 이뿐이랴. 후반부 말로만 들어오던 "십만 대군"들이 궁 앞에서 격돌하는 전투 장면은 스크린마저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선 궁 앞마당을 모두 담아내기엔 한없이 부족하게 느껴질 만큼 터질 듯한 스펙터클을 자랑한다. 거기다 여기선 반란군들이 죄다 금빛 옷을 입고 있으니 스케일과 화려함 면에서 얼마나 막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는지 여러 말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만하다.

그런데 이렇게 시각적으로 엄청난 공을 들였음에도, 막상 이 영화가 하는 이야기의 범위는 대단히 좁다. 대의나 정의와 같은 동양에서 흔히 생각할 수 있는 "큰 덕목"은 이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내내 계속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은 나라의 위기도 아니고, 황실 내부의 추악한 관계들에서 드러나는 일종의 치정극이나 다름없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반란군의 습격 그 목적이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한 큰 뜻 때문이 아니라 철저히 황후 개인적인 원한에서 비롯된다. 볼거리와는 달리 이야기의 스케일은 한없이 작은지라, 볼거리에 투자한 것이 과욕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장이모우 감독이 의도적으로 이러한 볼거리와 이야기의 대비를 노린 것이라면 꽤 생각해 볼 만한 부분들이 있다.

중국의 최고 전성기 중 한 때였던 당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영화 속에서 황실에 사는 이들의 생각과 행동들은 하나같이 철없기 그지없다. 하다못해 카리스마 철철 넘치는 황제조차도 영화 속에서 나라 사정에 대한 얘기는 거의 꺼내지 않는다. 단지 중양절 축제를 맞아 가족들의 화합을 도모한다느니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이다. 황제까지 그러는데 그 외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 황후의 관심사는 자신의 건강이 황제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이고, 세 아들의 관심사도 부모나 연인과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인간관계다. 차라리 닭살 돋더라도 이들이 대의를 위해서,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뭔가를 한다면 그래도 마땅히 해야 할 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라도 들겠건만, 황실 밖의 일에는 완전히 관심을 끈 채로 탕약에 독을 집어넣고, 피로 맺은 가족에 대해 치명적인 한을 품고, 누구와 몰래 밀회를 즐기는 등 비틀린 의식들과 인간관계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사람들이 당시 호황을 누리고 있던 중국을 다스리고 있다는 걸, 황실 밖의 백성들이 알았다간 몸서리를 치고도 모자라 이민을 가고도 남을 일일 것이다.

더 심한 것은, 이런 원한의 결과로 마지막에 가서는 거대한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황제의 자질에 대한 근본적 의심때문도, 나라의 미래에 대한 진정한 걱정때문도 아니라, 철저히 개인이 오랫동안 황실에서 살아오면서 쌓아온 두터운 원한에서 비롯되는 반란이다. 그런 반란에 십만 대군들의 목숨이 종잇장처럼 가볍게 희생되고, 눈요기에 부족함이 없던 병사들의 격돌 현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십만의 시신들이 널부러져 있는 소름끼치는 폐허가 되어버린다. 황족들의 욕망의 대상으로 희생당했던 어느 궁녀 일가의 최후 또한 이런 화려한 반란에 가려 무참히 묻히고 만다. 철저히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려 황실 밖에 대한 관심은 일찌감치 거두어 놓은 것도 모자라서,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애꿎은 백성들의 생명을 순식간에 그저 "소모"해 버리는 것이다.

눈을 어지럽게 하는 황실의 풍경과는 달리 철저한 이기주의와 어긋난 욕심으로 자신들을 보호하고 있는 황족들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한편으로 뒤틀린 욕망으로 망가져버린 황실의 나약한 단면을 비판하고 있는 듯 하기도 하다. 이는 영화의 결말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피바람이 한차례 신명나게 불고 지나간 뒤에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화려하고 말끔한 본모습을 되찾는 마지막 황실의 모습을 두고 평론가들은 중화사상의 부활을 노린다, 감독의 정치적 야심이 엿보인다는 얘기들을 하기도 했는데, 난 오히려 이 부분에서 감독이 황실에 대해 꽤나 부정적인 시선을 갖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흘린 피도, 하다못해 철저히 개인적인 이유에서 비롯되긴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황권의 전복을 꿈꿨던 황후의 다짐도,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 황제의 무쇠와 같은 태도 앞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간다. 피로 뒤범벅된 앞마당을 감쪽같이 뒤덮어 버리는 노란 국화들과 화려한 문양의 카펫처럼. 화려한 황실 속에서 편안하게 자기들의 욕망에만 중독된 황족들 앞에, 평범한 백성들의 피와 땀은 그저 국화와 카펫으로 덮어버리면 그만일 하찮은 것들에 불과할 뿐이다.

이처럼 영화 <황후花>는 눈부시기 그지없는 겉모습을 하고 있지만 알맹이는 부실하기 짝이 없는, 비유하자면 골다공증을 제대로 앓고 있는 중국 황실의 허위의식에 카메라를 들이댄다.화려하지만 자연스럽지 못한 황실 내의 모습은, 이런 겉모습처럼 비인간적으로 뒤틀린 욕망과 관계에 사로잡힌 황족의 나약한 단면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금붙이들로 잔뜩 치장하며 우아한 일과를 보내고 있지만, 이들에게서 결코 인간미는 느껴지지 않는다. 황실이라는 공간 자체도 인간미는 일찌감치 증발해 버린 듯하다. 그런 황실을 중심에 두고, 중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했던 것이다.(물론 이들이 실제 중국 역사에 존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총 0명 참여)
gullpong
좋습니다. 단지 중국의 황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힘과 권력의 허무함에 대해 얘기한게 아닐까 싶은데...   
2007-02-28 19:31
rainbowpage
좋은 리뷰네요..추천하고 갑니다..   
2007-02-04 21:24
whyjs
글 굉장히 잘 쓰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2007-02-04 14:3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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