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그랬다. 정말 위대한 영화는 시간을 정지시켜서 사색하게 만든 영화라는 거 그게 영화가 가지는 최고의 미덕이며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의 자궁을 획득한다고 말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그 찰나의 순간마저도 정지시켜서 영원히 간직하고 싶게 만들어버리고 싶은 느낌이 들 때, 비로소 그 영화는 위대한 영화가 되며 위대한 감독의 봉인이 된다. 영화를 볼 때 가끔씩, 이 영화가 끝이 나지 않았으면 하는 순간이 있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상상계의 시간과 공간이 현실의 그것이 되는 순간, 그것이야말로 관객으로서 맛볼 수 있는 가장 짜릿한 순간이 아닌가싶다.
허우 샤오시엔의 '쓰리타임즈'를 보는 내내 내가 마음속으로 간절히 원한건 영화가 멈추는 것 뿐이었다. 그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라니, 감격스러울 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가장 영화적인 언어로서 효율적인 쇼트와 미장센이 가능할까. 관객으로 하여금 카메라와 시선을 일치시켜버리는 숨막힘과 주인공들에게 모든 감정을 맞겨버리는 황홀한 전이감,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허우 샤오시엔이 보여준다. 이걸 위해 그가 사용한 건 현학적인 수사도 작위적인 연출도 아니다. 최소한의 컷과 최소한의 움직임, 최소한의 대사와 몸짓으로 최대한의 영화적 전율을 만들어낸다. 그걸 커다란 스크린에서 느낀 것 만으로도 벅찰 뿐이다.
쓰리 타임즈는 대만을 배경으로 사랑(연애몽).자유(자유몽).청춘(청춘몽)의 꿈이라는 세가지테마로 각각 1966년 1911, 2005년의 대만을 배경으로 영원히 간직될 두 남녀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가까운 과거, 근현대사, 그리고 현재에 이르는 역사.사회적 배경속에서 허우 샤오시엔의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랑의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하고 있다. 각 3개의 에피소드만으로도 하나의 이야기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전체맥락에서 영화가 추구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나 미래에 대한 염원(과거를 기준으로)이 아닌, 오롯이 현재에서 주어진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그들이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사랑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허우 샤오시엔은 대만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가장 현실에 충실한 순간을 재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영화 전편에 걸쳐 감독은 거장의 깊은 시선과 진심을 때로는 넘치게 때로는 황홀하게 골고루 뿌려준다.
뭐니뭐니해도 이 영화의 첫번째 에피소드 '연애몽'은 최고의 영화다. 그리고 영원히 이 순간을 기억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아마도 내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중에 하나가 아니었나싶다.
사실, 이 '연애몽'은 뻔하고 진부한 스토리라인을 벗어나지 못한다. 당구장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녀가 어느정도의 시간을 두고(남자는 군대에 간다) 수줍게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이 이야기에는 허우 샤오시엔은 음미하듯 천천히 조응하는 카메라의 시선 속에 관객의 기대를 배반해버린다. 첫장면에서 당구를 치는 첸의 모습과 시선 그리고 공을 향해가는 큐대와 공의 이동, 그리고 공을 따라가 건너편에 있는 슈메이의 모습과 첸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이어지는 정말 압도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롱테이크 쇼트가 있는데 그 완벽한 연출은 소름이 끼칠정도이다. 유려한 카메라의 움직임과 함께 슈메이와 첸의 시선, 몸짓하나하나는 그 자체로 미장센이 되어버린다. 롱테이크는 롱테이크 나름대로 첸이 슈메이를 찾아 헤매는 여정을 단축적으로 보여주는 표지판들의 나열같은 편집은 편집대로 어느 것도 버릴 것없이 이유있음을 보여주며 그 순간에 뻔한 스토리 라인은 그만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딥 포커스와 쉘로우 포커스, 그리고 빛과 색채의 조화, 그리고 절제된 대사와 침묵, 언어가 되어버리는 황홀한 음악까지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적 경험이라는 게 보는 것이 아니라 몸소 느끼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들은 최소한의 대화를 나눌 뿐이지만 그들의 표정과 시선, 몸짓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수천마디 수만마디의 교감을 나눔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다시말하지만 그 순간 이 영화는 더 이상 뻔한 스토리가 이난 황홀한 체험의 시공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들이 실로 오랜만에 재회하는 순간이 있다. 수많은 곳을 돌아다니던 첸이 슈메이와 당구장에서 만나는 그 순간에 둘은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면서도 그저 서로를 바라보기만 한다. 그저 수줍게 서로 바라보고 웃기만하는데 카메라는 그저 그걸 또 바라본다. 정말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그 순간 허우 샤오시엔은 잠시나마 시간을 정지시켜준다. 그 관조적인 태도가 얼마나 사람을 짜릿하고 황홀하고 하는지를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다는 건 언어가 영상을 이기지 못하는 증거일 수도 있다.(ㅋㅋ) 가장 형용할 수 없는 순간은 다시 군대로 돌아가기 전 그들이 함께 있는 짧은 순간에 담겨진다. 첸과 슈메이가 아주 천천히 손을 꼭 잡는 그 순간에 카메라는 좀처럼 다가서지 않던 방식을 바꿔 그들의 두 손을 클로즈업으로 그것도 롱테이크로 보여준다. 그 순간은 아마 바로 위의 오랜만의 만나는 장면보다도 짜릿할 것이다.
그들이 실제로 함께 한 건 얼마 안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이 소통하는 감정의 공유의 파장이 얼마나 크고 간절한것인지가 느껴진다. 다른 수많은 영화들이 남녀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수많은 닭살스러운 대사와 행동으로 몸부림을 칠 때 허우샤오시엔은 인물의 시선과 그것을 응시하는 카메라의 태도, 순간적인 침묵과 음악으로 그들의 사랑을 말힌다. 그 순간 스크린속에 투시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두 남녀의 사랑을 확인하는 영화적 언어가 되는 것이다. 즉, 사랑이라는 것이 수많은 영화에서처럼 번지르한 대사와 과도한 애정표현, 감정의 과잉으로 보여지지 않고 은유로 가득한 인물들과 카메라의 시선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영화적 표현은 영화 내내 이루어진다.
'연애몽'이 두 남녀가 사랑을 확인하는 행복한 순간이라면 두번째 에피소드 '자유몽'은 이뤄지지 못하는 사랑을 확인하는 슬픔의 순간이다. 허우 샤오시엔은 빛과 어둠이 조화를 이루는 로케이션 촬영에서 폐쇄적인 세트 촬영으로 무대를 바꾸는 동시에 무성영화 기법을 통하여 그 감정을 충실히 전달해낸다. 신분의 차이를 두고 있음에도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두 남녀가 끝내 신분의 차이와 일제시대라는 사회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의 단절을 겪는 비통함이 무성영화의 이중적인 전달(주인공이 말하는 장면이 나오고 그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오는 자막이 뜬다)이라는 방식속에서 효과적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리 대화를 나눠도 침묵속에 있는 것 같고 그 침묵은 끝내 단절을 야기하는 것 같다. 신분의 차이로 인해 끝내 서로에게 진심으로 다가가 사랑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그 안타까움이 자꾸 단절되는 대화와 미장센 속에 절묘하게 봉합된다. 그리고 이 위대한 감독은 여기에서도 백마디 말보다 그들의 시선이 더 중요함을 보여준다. 다른 영화속에서 수십번씩 남발되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추억하고 싶고 기억하고 싶은 사랑을 이 영화에서 만난다. 영화의 본질은 말이 아니라 영상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순간일 것이다.
앞의 두 에피소드가 이뤄낸 성취감에 비하면 세번째 에피소드 '청춘몽'은 확실히 모자라는 느낌이 든다. 우선 세가지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서기와 장첸이 이전의 두 에피소드와는 굉장히 다른 캐릭터로 나오는 데다가 그들이 추구하는 사랑의 방식도 적극적이며 정열적이다. 게다가 서기의 난데없는 동성애적 요소를 비롯한 기본설정이 그런 느낌을 더해낸다. 그렇기 때문에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았을때 관객이 이질감을 느끼게 바라보는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으로 접근했을 때 이 세번째 에피소드는 100여년 걸친 근현대사를 통해 사랑의 각기 다른 방식들-설레는 첫사랑, 이루지못하는 안타까운 사랑, 그리고 현재에 충실한 사랑-의 총체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방식으로 바라봐야한다. 허우 샤오시엔은 단순히 한 세기에 걸친 세가지 사랑이라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각기 다른 방식의 사랑 속에 시대의 모습, 소통의 방식을 절묘하게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대별로 달라지는 연락의 방식-대면, 편지, 휴대폰-이라든지 사랑에 대한 표현의 적극적인 정도등은 억압과 개방이라는 사회적 현실맥락과 함께 그 시대를 담아낸다. 그만큼 샤오시엔은 폭넓은 시선으로 매순간 사랑을 노래한다.
각각의 시대에 맞게 1960년대의 '연애몽'이 수줍은 아날로그적인 사랑을 ,1910년대의 '자유몽'이 식민지시대속의 신분의 차를 넘지 못하는 사랑의 아픔을 그려냈다면 2005년이라는 대만의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두 주인공이 그리는 '청춘몽'은 청춘이 전해주는 정열과 도발을 그려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만큼 세번째 에피소드에서 사랑의 의미는 보다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전의 이야기와는 달리 그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마음가는 대로 상대를 탐하고 행동한다. 그들 각자의 연인들은 '자유몽'의 신분차이같은 방해물이 될 수 없고 그들의 태도는 간질병이나 실명같은 병적인 요소따위로 막을 수 없을 만큼 적극적이고 정열적이다. 그 정열적인 이야기만큼이나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표출되는 이미지들도 적극적이고 숨막히듯 조이는 모습을 보인다.
'연애몽', '자유몽'이 각각 사랑의 성취와 단절이라는 끝을 보여준다면 세번째 에피소드는 사랑의 현재를 말한다. 결국 허우 샤오시엔은 수줍은 듯 시작되는 사랑의 설레임을 기억하고 추억하며 끝내 이뤄내지 못한 사랑의 아픈 기억을 기억하고 추억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끝내 사랑의 현재성을 외면하지 못한다. 지금 당신앞에 찾아온 그 사랑앞에 솔직하고 충실하라는 것을 이 위대한 시네아스트는 깊이있는 통찰과 시선으로 부드럽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세번째 에피소드는 앞의 이야기에 비해 관객과의 접접을 찾기가 힘들수도 있지만 그것이야말로 허우 샤오시엔이 하고자 하는 얘기가 아닌가 싶다. 그 사랑이 어떤 사랑보다도 위험하고 상처를 줄게 분명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 역시 지나간 사랑을 추억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몸소 보여준다. 그래서 마지막 사랑에는 결말이 날 수도 희망을 야기할 수도 통탄을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얘기하는 긴 여행의 현재의 종착지라면 나는 그것에 따를 수 밖에 없다. 매순간마다 시간이 정지되었으면 하는 영화 속 기억과 추억이 내것이었으면 하는 욕구를 만들어낸 감독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의 시선그대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밖에는 없다.
분명한 건 많은 관객들은 허우 샤오시엔이라는 위대한 거장이 손수 들려주는 따뜻한 여행의 순간들에 동참하고 싶어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그가 보여주는 영화의 순간순간들은 압도적이다. 때로는 카메라의 시선은 내 시선의 전부가 되고 침묵과 관조속에서도 순간순간 감정이 넘쳐흐른다. 그 넘쳐흐르는 감정은 과잉이 아닌 감정의 전이가 되고 매순간 매혹적이다. 결코 우리는 이 영화를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매순간 카메라는 최소한의 움직임과 쇼트만으로 완벽에 가까운 영상미를 만들어낸다. 로케이션이든 세트든 언제나 그의 영상은 유려하고 관능적이며 아름답다. 영화의 전반에 걸쳐서 주된 감정의 불러일으키고 '자유몽'에서는 아예 대사이자 언어가 되기까지 하는 음악은 황홀할 정도다. 또한 매혹적인 두 배우 서기와 장첸은 세번의 시간속에서 세번의 사랑을 각기 세명의 캐릭커 속에서 그 자체로 완벽하게 현실을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매순간 그와 그녀가 될 수 밖에 없다. 매끄러운 시선처리와 표정, 몸짓 하나까지 그들이 허우 샤오시엔의 그와 그녀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한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우리에게 어떻게 영화를 만들것이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함께 해준다. 영화적인 표현이라는 것은 모든 지 매순간 이유가 있어야 하며 의미가 없는 과도한 영화기법(지나친 롱테이크, 이유없는 점프컷이나 인서트컷)들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 말이다. 정말로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내용을 담기 위해 미장센이든 몽타쥬든 롱테이크든 포커스 이동같은 영화언어가 필요한 것이지 단순히 표피적인 이미지전달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 말이다. 허우
샤오시엔은 매순간 그 진리를 눈으로 몸소 꺠닫게 만들어주는 위대한 스승이 된다. 아마 우리는 이 영화를, 위대한 거장의 손길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그와 그의 영화는 압도적이다. 영화내내 우리는 최소한우리는 이 위대한 시네아스트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 기뻐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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