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는 꿈을 영상으로 담아내기에, 이야기의 순서가 뒤죽박죽이다.
또한 그 이야기. 엉터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팔이 8개 달린 인간이 우주인이 되어 지구를 정복하는 영상은 그래서 초현실주의라 할 수 있다.
개미가 내 손을 파먹고 있다면, 그것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표현주의는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정신병에 걸린 사람처럼, 불안에 떨며 얼굴이 일그러진다.
건물은 마치 기울어지기 일보직전이 것처럼 불쾌해보이며, 사람들의 시선은 무섭기만 하다.
조울증에 걸린 환자처럼, 미치광이의 분노처럼..
하나의 영화가 두 개의 양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그러나 이 작품! 이야기는 초현실주의를 따라감에, 표현주의의 영상을 가끔 삽입하고 있으니!
기괴하다 못해 난해하고 난감하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 어찌 맞추어야만 하는 것일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모두 꿈으로 돌리고자 한다면, 그래도 좋다.
반대로 이야기들을 맞춰서 옳다고 믿는다면, 그래도 상관없으니..
미셸 공드리의 작품. 그냥 편안하게 받아들이면 충분하다.
문제는 바로 사랑과 이별 이야기!
'이터널 선샤인'에서 받았던 즐거움과 놀라움에 이 작품을 연결해서 본 이들이 많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러했으니..
헌데, 이 두 작품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며 이어가고 있다.
바로 '사랑'이라는 두려움의 소재를 다루며..
사랑을 한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현상이다.
분명 내가 좋아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눠야만 함에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한 반면,
반대로 그렇게 되었다 할지라도 사랑은 이별로 흐르고, 다툼으로 흐른다.
'이터널..'에선 사랑을 했다가 이별을 한 뒤, 다시 사랑에 빠지는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새로운 사랑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그들이 겪었던 아픔을 다시 이어가는 과정에 불과했다.
즉, 사랑에 대한 환상으로 시작된 사랑이, 상처의 결말로 다시 이어진다는 것이다.
'수면의 과학'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을 함에 있어서, 자신이 좋아했던(좋아한다고 믿었던) 처음의 여자(조이)를 버리고,
새로운 여자(스테파니)를 좋아함에 다가가지만 그것마저도 불안하다.
혹시 그 여자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다면?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불안은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출발했으며, 시작과 동시에 결말을 본 것이다.
이 불안함의 총체! 그것이 바로 사랑이 지닌 이면의 모습이었으니..
사랑을 하는 모든 이들, 혹은 사랑을 했던 모든 이들은 이를 잘 알 것이다.
사랑을 하고 있는 그 순간보다, 오히려 사랑을 하기 전 그 두근거림과..
이별을 하고난 후 아련히 기억되는 그 느낌이 더 강렬하고 사랑에 가깝다는 사실을!!
'어떻게 하면 그(그녀)와 사귈 수 있을까?' '아! 그때 정말 좋았었는데..'
꿈을 통해서 비극을 먼저 맞본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반대로 현실에서 비극을 맞보는 것보다는 오히려 괜찮을 것이니..
사랑.. 그것 앞에 완벽한 사람은 이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적어도 처음과 이별 후를 떠올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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