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공드리 세계의 종합
미셸 공드리 세계의 종합, 그러나 <이터널 선샤인>의 실패 버전. 카우프만이여 공드리를 돌보라
“왜라고 질문하지 않으면서 나의 아이디어, 이미지, 컨셉들을 표현하고 싶었다. 제한받지 않고 내 머릿속을 탐험해보고 싶었다”며 <수면의 과학>의 감독 미셸 공드리는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 말을 생각해보면, 이 영화는 사실 수면의 과학이기보다는 수면의 비과학에 대해 훨씬 동조하는 편이고, 그 상태에 대한 매혹에서 출발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감독은 ‘나도 프로이트 책 몇권쯤은 읽었다’는 티를 초반부에 내고 싶어하지만, 이내 자기의 방식대로 나아가며 비과학적 수면의 세계가 얼마나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무의식의 터가 되는지를 역설하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 자리잡은 사랑은 바로 이런 무질서한 모양새가 아니겠냐고 묻는다. <빌리지 보이스>의 평론가 짐 호버먼은 아마 동의하는 마음으로, “감미롭고, 광기어린, 그러면서도 비애의 색조를 띤 공드리의 새 영화 <수면의 과학>은 놀라운 혼성물”이라며 첫 문장을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문제는 호버먼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터널 선샤인>이라면 그 표현이 어울리겠지만, <수면의 과학>에는 덧붙여야 할 결함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공드리의 전작 <휴먼 네이쳐>와 <이터널 선샤인>을 보았던 관객은, 그리고 그 두편의 시나리오를 모두 찰리 카우프만이라는 할리우드의 괴식물 같은 시나리오작가가 썼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수면의 과학>에 두 가지 내기를 걸게 된다. 찰리 카우프만 없는 공드리의 영화는 성공할 것인가, 그러면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이다. 그런데 공드리의 이번 영화는 두 가지 질문 모두에 믿음을 주지 못한다.
어린 시절 부모가 헤어지자 아버지를 따라 파리를 떠났던 스테판(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암으로 아버지가 죽자 다시 어머니가 있는 이곳으로 돌아온다. 그는 창조적인 예술가와 발명가로서의 일을 하며 살아가고 싶어하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꿈과 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해 주위 사람들을 긴장시키곤 하는 그에 대해 어머니는 “6살 이후 꿈과 현실이 뒤섞여버렸다”고 설명한다. 여하간 그의 입장에서 보면 현실 세계의 지루함을 견디기가 고통스럽다. 어머니의 소개로 들어간 달력 제작사에서의 일거리 역시 스테판을 지겹게 만든다. 그때쯤 건너편 집에 한 여자가 이사를 온다. 그녀의 이름은 기이하게도 스테파니(샬롯 갱스부르)다. 스테판과 스테파니. 처음에 스테판은 그녀의 친구인 조이에게 먼저 마음이 끌리지만, 점점 스테파니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그녀의 면면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쉽게 가까워질 것 같으면서도 연인이 되지 못하는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는 무작정 펼쳐지는 스테판의 꿈과 현실,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진전없이 머무른다. <이터널 선샤인>에 이어 공드리는 위기에 봉착해버린 러브스토리의 인물들을 두 번째 다루고 있다.
잠. 공드리의 영화에서 잠은 오래된 것이다. 그들은 잠만 자지 않고 꼭 꿈을 꾼다. 그러니까 꿈. 공드리를 뮤직비디오계의 발명가 자리로 만든 그 시절의 작품들에는 얼마나 많은 인물들이 잠들고 꿈속을 헤매고 또 깨어나는가. 거기에서 꿈은 현실을 덮어 서로의 경계를 뒤섞어버리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다. 비욕, 케미컬 브러더스, 푸 파이터스, 벡, 그 밖에 수없이 많은 뮤지션들의 뮤직비디오가 잠과 꿈의 세계에서나 있을 법한 기발함을 선보여 인정받았다. 꿈이 현실로 연장되어 현실을 초현실의 세계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공드리만의 독특한 시각장이다. 게다가 그 표현들은 하도 기특하여 이내 안아버리고 싶을 만큼 귀여운 장면들이다. 무의식을 시각화하는 것에서 공드리가 관심있어하는 것은 근사한 하나의 신세계를 어떻게 콜라주해 탄생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수면의 과학>에서도 그런 장면들은 여전히 있다. 꿈속에서 함박만하게 커지는 스테판의 손, 그리고 그 손을 첨단의 기술이 아닌 그냥 커다란 소품으로 무작정 대체해버리기. 서투른 애니메이션적 요소들, 조악해 보이지만 그래서 그 빈틈으로 상상력을 초대하기. 1초 타임머신 기계와 독심술 기계 등 말도 안 되는 장난감들의 등장, 그러나 그것들의 기능이 발휘되면서 실제의 숏을 지배해버리는 그 영화적 뚝심. 공간 전환에 사용되는 재치있는 연극적 무대의 운용, 그리고 무엇보다 인물의 상황과 동작에 조화를 이루는 음악의 기가 막힌 개입의 템포. 그것들이 합해져 현실과 환상을 등치로 놓고 제멋대로의 방식으로 나아가는 편집. 그 점들을 보면 이 영화는 자유롭다. 그걸 산만함과 무질서에 대한 유아적 욕망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산만함은 생산성을 저해한다”는 영화 속 동료의 말에 스테판도, 그리고 그 인물이 자기의 분신이라고 말한 바 있는 감독 공드리도 끝내 그 말의 뜻을 반대로 읽으려 들 것이다. 혹은 유치하다고 평해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은 유아적 꿈의 세계이니 어쩔 수 없다고. <수면의 과학>은 유아적이기 짝이 없는 스테판이 어머니를 떠나 다른 여자를 찾는 이야기를 다룬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만약 이것이 꿈이라면 이건 아이의 꿈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유아적 테마가 투정과 애교 말고는 별다르게 다른 것을 담지 못한다는 점과 그걸 보여주는 시각화가 이미 뮤직비디오에서 모두 본 것의 종합일지언정 이 영화가 뮤직비디오는 아니라는 점이다. 둘 중에서도 후자가 더 치명적인 결함이다. 여기에 찰리 카우프만이 없다는 건 그보다 더 치명적이다. 찰리 카우프만이 공드리의 영화에서 조타수 역할을 했음은 <수면의 과학>으로 확실히 증명이 된 셈이다. 무엇보다 <수면의 과학>은 카우프만의 결장으로 인해 현실과의 긴장감을 잃어버린다. <휴먼 네이쳐>와 <이터널 선샤인>의 상상력은 무의식이 현실을 가르고 그 자리에 들어설 때에야 긴장을 만들어낸다. 단 한 가지만 지적해도 되는데,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겪었던 그 아련한 사랑에 대한 정서가 <수면의 과학>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결코 스테판과 스테파니의 사랑에 대한 갈등이 그들에 비해 가벼워서가 아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수면의 과학>을 즐겁게 보기 위해서는 음악을 듣듯 몸을 영화의 흐름에 내맡기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이 상투적인 매뉴얼은 이 영화가 음악과 호환 가능한 불가사의한 리듬을 갖고 있다는 말이기보다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외에는 별다르게 즐길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유쾌한 영화인 건 분명하지만, 산만하고 유치해서 지루해지는 그것을 참을 수 있을 때에만 유쾌하다. (글 : 정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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