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선 그럭저럭 지나갔던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대표적인 원인 중 하나로, 기존의 일본 드라마에서 쉽게 보지 못했던 남성상의 등장을 드는 의견이 있다.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오로지 사랑하는 여인만을 바라보는 순정파 남성 캐릭터가 이전까지의 일본 드라마에서 흔치 않았으나, <겨울연가>에서의 부드러운 순정파 남성 캐릭터의 등장에 이러한 캐릭터를 열망하던 일본의 중장년 여성들이 열광했다는 분석이다. 우리나라에선 어쩌면 닳고 닳은 캐릭터일지도 모르겠지만, 바로 옆에 있는 이웃나라에선 이런 캐릭터를 신선하게 느꼈다는 게 참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일본영화로서 최신작에 속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옛스러운 정서를 지닌 듯한 <눈물이 주룩주룩> 역시 이런 쪽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겨울연가>와 함께 "사계절 연작"의 하나인 <가을동화>와 흡사할 것만 같은 스토리라인에 제목까지 대놓고 이 영화는 신파입니다하고 광고를 하는 듯한 배우와 감독이 꽤 마음에 들긴 했지만 기대를 별로 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니, 이 영화는 그런 뻔한 신파멜로의 정서와는 좀 길을 달리 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는 굉장히 당황스럽게 느껴지겠지만, 나에게는 꽤 신선하게 다가왔다.
한적한 바닷바람이 생기를 돋우는 일본 오키나와. 여기에는 다른 핏줄에서 나온 남매, 요타로(츠마부키 사토시)와 카오루(나가사와 마사미)가 있다. 요타로의 어머니와 카오루의 아버지의 결혼으로 남매의 연을 맺게 된 두 사람. 잠시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는 나날을 보내지만 책임감없는 아버지가 가족을 떠나게 되면서 불행은 시작된다. 절망한 어머니는 마음의 병이 들어 결국 세상을 떠나고, 두 남매는 할머니의 손에 맡겨져 오키나와에서 자란다. 나이드신 할머니 곁에서 의지할 사람이라곤 서로 밖에 없었던 두 사람. 요타로가 성인이 되면서 섬을 나와 육지에서 돈을 버는동안 두 사람은 오랜 시간 떨어져 있었다. 그러다 카오루가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육지로 건너오면서 두 사람은 기쁨의 상봉을 하고, 요타로의 허름한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여전히 남매로서 살아가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둘이 남남인 것이 사실이라, 서로를 향한 설레는 감정을 숨기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서로의 감정에 앞서 먹고 살아가는 것부터가 급한 그들에게 눈물 잔뜩 흘리면서 사랑을 말하는 건 사치처럼 느껴질 뿐이다. 그렇게 감정을 참아가며 함께 살아가려 노력하지만, 자꾸만 힘들어지는 현실은 그들의 눈물을 참을 수 없게 한다.
현재 일본 영화계를 주도하는 두 남녀 청춘스타가 만난 이 영화에서 그 배우들의 영향력이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오죽했으면 두 배우의 매력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평가가 있을 만큼, 이 영화에서 두 주연배우의 매력은 십분 발휘된다. 일본의 대표적인 꽃미남 배우로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부터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인기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츠마부키 사토시는 이 드라마에서 동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자상한 오빠라는 대단히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출연해 뭇여성들의 심장을 충분히 벌렁거리게 할 만한 연기를 보여준다. 이전에 우리에게 선보였던 모습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억척스럽고 강한 모습도 보여주면서 그 속에는 동생을 한없이 배려하고 위해주는 변함없는 순정남의 모습을 안고 있음으로써 상반되는 매력을 잘 조화시켜 보여준다. 예전부터 그래왔지만 이번 영화에서도 그저 샤방샤방한 외모로만 승부하지 않고 가장으로서의 강한 생활력과 청춘의 세밀한 감성이 뚝뚝 묻어나는 연기를 꽤 인상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래도 츠마부키 사토시는 이전부터 눈에 익을 만큼 봐 왔는데, 정작 나는 이 영화를 통해서 카오루 역의 나가사와 마사미의 매력을 새삼 실감했다.(개인적으로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보지 못한 관계로) 배우를 외모로만 평가하는 건 결코 좋지 않지만 사실 외모로만 봤을 때에는 동년배 여배우들에 비해서 그렇게 두드러지는 매력이 느껴지지는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서 왜 이 배우가 사랑받는지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가늘게 웃는 웃음이 귀를 간지럽힘에도 너무나 사랑스럽게 들리고, 약간 어눌하면서도 또박또박 대사를 소화하는 모습은 얼마나 귀엽던지. 오빠를 향해 "니니~~!!"하고 외칠 때의 그 낭랑한 음성이 주는 청량감까지, 보는 사람도 덩달아서 미소를 짓게 되더라. 영화 속에서 카오루는 요타로가 끝까지 지켜주고 싶은 인물인 만큼, 캐릭터 특유의 보호본능을 제대로 일으켰다. 물론 감정의 세심한 묘사에도 정성을 다해 연기력 면에서도 뒤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눈물이 주룩주룩>의 매력에 있어서 상당 부분은 온몸으로 캐릭터의 매력을 선명하게 드러내며 뻔한 내용임에도 몰입할 수 있게 하는 배우들의 몫이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이 영화의 감독인 도이 노부히로는 그의 스크린 데뷔작이자 대히트작인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 이어 <눈물이 주룩주룩>에서도 같은 듯 다른 자신만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듯하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서 그는 신파멜로로서의 절절한 감정 이외에도 애틋한 가족애를 가미시킴으로써 일반적인 신파멜로와는 사뭇 다른 보다 훈훈하고 여운이 남는 감동을 가져다주었는데, 이러한 감성이 <눈물이 주룩주룩>에도 그대로 이어지는 듯 했다. 출생의 비밀을 안고 그저 둘만의 사랑의 감정을 갖고 펑펑 울기만 하는 신파멜로를 기대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제목과는 다르게 영화는 눈물을 아끼고 있었고, 그 뒤에는 그들의 사랑보다도 어쩌면 더 절실했을 "생활"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요타로와 카오루는 슬플 때에는 마음껏 울기보다 눈물을 참으라고 배웠다. 단 둘이 남겨진 세상에서 정신 바짝 차리고 서로를 잘 지키려면 슬플 때 마냥 울기보다는 코를 막고 눈물을 꾹 참으라는 것. 돌아가신 어머니도 가장이나 다름없는 요타로에게 그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만큼 두 남매가 살아온 환경은 슬프면 마음껏 울어도 될 만큼 편한 환경이 아니었다. 동생을 무사히 학교로 보내기 위해 요타로는 어린 나이에 섬에서 육지로 나와 시장 배달이니 식당 홀서빙이니 하는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돈을 벌었고, 그 와중에도 자신이 주인인 레스토랑을 만드는 것을 꿈으로 삼고 달려왔다. 청춘의 낭만보다는 생활을 위한 몸부림이 그들에겐 더 절실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넋놓고 펑펑 우는 건 일분일초가 아까운 그들에게 있어서는 사치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영화는 두 사람의 진해지는 감정과 더불어 보다 힘들어지는 그들의 생활을 함께 부각시키며 상황을 더욱 애절하게 이끌어가지만, 눈물을 아끼고 서로가 절실해질수록 더 밀어냄으로서 폭발할 것만 같은 감정을 최대한 절제한다. 사랑하는 감정을 서로에게 갖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함에도 그들은 그런 감정을 제대로 표현도 하지 못하고 그저 뒤돌아서서 코를 막고 눈물을 참을 뿐이다. 이렇게 이들이 눈물을 최대한 아끼고 감정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홍보사가 내건 "순정멜로"에 걸맞는 핑크빛 사랑이라든가, 오랜만에 제대로 울만한 신파멜로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낚였다는 생각을 할 만도 하다. 하지만 남매라는 관계 속에서 펼쳐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만 초점을 맞췄더라면 적잖이 식상해 했을 나에게 이 영화가 주는 감정의 파장은 생각보다 새롭고 여운이 남게 다가왔다.
앞서 얘기했듯 두 남매의 세상에는 단지 사랑에만 집중할 수 없는 모진 삶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삶 속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보듬는 모습도 한편으로 생각할 때는 연인으로서의 애타는 사랑의 감정일 수도 있겠지만, 가족으로서 끝까지 서로를 챙겨주려는 속깊은 모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타로의 감정이 대표적인 경우다. 여동생이 드디어 육지에 온다는 소식에 그 어떤 일보다도 기뻐하고, 무슨 일 있다 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금방 달려가서 챙겨주는 그의 모습은 든든한 연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부모가 없는 두 남매의 가정에서 아버지나 다름없는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가지게 될 가족에 대한 한없는 사랑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는 무책임하게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사라진 채 온전히 두 사람만 남겨진 이 만만치 않은 세상 속에서,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의지할 만한 가족으로 서로를 챙기고 위해주는 모습은 단순히 연인으로서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을 넘어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한 절실한 의지, 가족에 대한 순수한 애정으로 비쳐져 더 가슴을 훈훈하게 했다. 더불어 이러한 두 남매 주변에서 늘 웃음을 더하게 하는 이웃과 친구들의 모습은, 이 영화가 단지 두 사람의 사랑만이 남은 동화같은 세상이 아니라 삶을 위해 치열하게 부딪치는 현실의 기운이 느껴지는 세상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을 더욱 생생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렇게 이들이 자신들의 감정을 참고 있음에도, 관객들이 보기에 그들이 품고 있는 감정의 절실함은 더욱 선명하게 와닿는다. 의지할 곳이라곤 서로 밖에 없는 두 사람, 거기다 한창 청춘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두 사람에게 서로를 향한 감정이 숨긴다고 제대로 숨겨지기야 하랴. 그것이 가족애이든, 이성으로서의 감정이든, 눈물을 아무리 참아내려 하도 감정은 펑펑 쏟아지는 법이다. 모진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있는 두 사람의 감정을 영화 시작부터 천천히 따라간다면, 두 사람은 코를 막고 눈물을 참더라도, 본래의 감정과는 다르게 활짝 웃더라도 그 속에서 쩔쩔 끓는 애타는 마음은 충분히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물구멍을 좁힐수록 물은 더욱 세게 뿜어져나오는데, 눈물도 당연히 그렇지 않겠는가.
이렇게 <눈물이 주룩주룩>은 영화를 보기 전에 생각했던 전형적인 신파멜로와는 상당히 다르면서도, 달라서 오히려 더 인상적인 맛을 지닌 영화로 느껴졌다. 현실과 차단된 채 두 사람의 감정만 부각시키며 슬픈 감정을 강요하기보다, 휘몰아치는 현실 속에 남겨진 연약한 젊은이들의 모습을 통해 그들이 서로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이 왜 그만큼 절실해 질 수 밖에 없는지를 설득력 있게 대변한다. 이러한 그들의 감정과 세상의 대립 속에, 영화는 사랑이야기 안에서만 노는 것이 아니라 눈물을 이겨내고 다시 꿋꿋이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삶의 기록으로서 그 가치를 더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여태까지 꾹꾹 눌러두었던 눈물을 마침내 쏟아내는 카오루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이야기한다. 강해지기 위해서 눈물을 참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가볍게 일어나기 위해서는 안에 있는 눈물을 모두 떨구는 것도 중요하다고. 영화는 그렇게 비극적 운명 속에서 스스로 사그러져 가는 사랑을 통해 좌절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둘씩 떠나고 홀로 남겨지는 세상 속에서도 세상을 향해 치열하게 달려나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눈물 속에서 한줄기 희망을 던진다. 공감하기 힘든 사랑의 벽 속에서 쩔쩔 매는 이들의 모습이 아니라, 삶을 향해 치열하게 달려가며 내일을 위해 아픔을 털어내고 점점 강인해지는 이들의 모습이 남아서, 이 영화 <눈물이 주룩주룩>은 생각보다 더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나의 기억에 남았다.
한 마디 더 :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도 절대 자리에서 일어나지 마시라. 영화의 원안이나 마찬가지인 노래 <눈물이 주룩주룩>이 가슴을 울리는 것은 물론이요, 그 뒤에 등장하는 어린 두 남매의 대화 장면은 막 싱숭생숭해진 관객의 가슴 속에 더욱 투명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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