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종교는 신이나 교회, 성스러운 동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액세서리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적 몰입의 근원은 자아에,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자아의 거부에 있다. 헌신은 자아 거부의 앞면이다. 종교적 동물은 오직 인간밖에 없다. 왜냐하면 몽테뉴도 지적했듯이 '자기를 증오하고 경멸하는 것은 다른 피조물에서는 볼 수 없는 인간에 국한된 병'이기 때문이다.
에릭 호퍼
밀양을 봤다. 에릭 호퍼의 저 아포리즘은 극장의 살가운 어둠 속에서 스크린 위의 살풍경들을 바라보며 내가 떠올린 문장이다. 요즘 그의 책을 읽고 있는 탓이리라. 어쩌면 종교라는 이름을 단 이 아포리즘에 기대어 영화를 바라보는 것은 오독일는지 모른다. 이창동 감독이 칸 시사회에서 '이 영화는 종교영화가 아니다'라고까지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종교라는 이름을 단 이 문장은 사실, 종교에 대한 통찰이 아닐 게다. 이것은 '나약한' 인간에 대한 통찰이며, '변화무쌍한' 자아에 대한 통찰이고 '삶과 용기'에 대한 통찰이다. 영화 '밀양'이 그러했듯이.
나약하기에, 인간이다
신애는 죽은 남편이 태어나 자랐던 곳, 밀양으로 흘러든다. 어린 아들과 함께. 무얼 바라서 경기도 안좋고 인구도 적은 밀양에 피아노 선생질을 하러 온 것일까. 피아노 선생질 같은 건 서울서 더 잘 팔릴텐데 말이다. 가족의 반대도 심했던 모양이다. 주위 사람들도 왜 그곳까지 왔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남편과 사별한 여자가 보험금과 아들만 달랑 데리고 연고도 없는 지방도시에 오다니 무모하지 않는가. 아들이 '흙 밟고' 자라기를 바라서? 가당찮다.
어느날 서울서 동생이 찾아온다. 신애에게 묻는다. 매형은 누나 배신하고 다른 여자랑 바람핀 사람이야. 근데 왜 여기까지 와서 살겠다는 거야. 신애는 답한다. 아니야. 그건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래. 그 사람이 사랑한 건 우리 둘밖에 없어. 신애는 우리에게 답했다. 밀양으로 온 이유에 대해서. 그녀가 본래의 기억을 거세하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낸 매커니즘. 이것은 신애가 밀양으로 온 그것과 같다. 그녀는 정말 "살러" 온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나약해서, 무모하다.
변덕스럽기에, 인간이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 눈먼자들일는지 모른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는 지팡이가 필요하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려줄 하얀 지팡이 말이다. 손목에 묶어 놓으면 잃어버리기도 힘든 지팡이. 우리는 흔히 그것을 '희망'에서 찾는다. 희망은 꿈도 될 수 있고 사랑도 될 수 있고 가족도 될 수 있고 헛된 욕망도 될 수 있다. 때로 우리는 그것을 영원불멸한 존재에게서 찾기도 한다. 하지만 지팡이는 쉬 부러지고 만다. 길을 가다 다른 이들에게 부딪히기도 하고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희망'이라는 지팡이를 바꾼다. 바꾸고, 바꾸고 또 바꾼다.
신애의 지팡이는 사랑이었다가, 아들이었다가, 신이었다. 하지만 결국 모두 잃어버리고 만다. 저 나름대로 용서를 구해버린 뻔뻔한 유괴범 앞에서 그녀는 마지막 지팡이조차 잃어 버렸던 거다. 지팡이를 모두 잃은 신애에게 남은 것은 증오밖에 없었다. 신에 대한 증오? 아니다. 그건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다. 그녀가 손목을 긋고 함께 잠 잘 남자를 찾았던 이유는, 신을 비웃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비웃기 위해서였다.
살아가기에, 인간이다
한 없이 나약하고 변덕스러워 신의 뜻대로는 결코 살지 못하는 우리 인간에게 구원이란, 그저 삶이다. 살아 있음, 그것 말이다. 하지만 무용한 희망조차 찾기 힘든 세상에서 살아남기는 쉽지 않다. 신애가 그렇게 밀양에 내려온 이유도, 교회에 나간 이유도, 자신을 학대한 이유도 결국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우리는 살기 위해서 조금은 더 단단해져야 하는지 모른다. 삶의 우연들을 조합하고 그것을 사랑 혹은 신앙으로 둔갑시켜 거기서 희망을 찾기도 하지만, 사람들에 밀려 쓰러지고 상처입고 증오하지 않으려면, 아니 그걸 다 견뎌내려면 가슴 속 어디선가 끓어오르는 뜨거움, 슬픔과 고통의 심연에서만 건져올릴 수 있는 당당함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유괴범의 딸은 용감하다. 살인자의 딸이라는 낙인, 주변에서 쏟아졌을 혐오와 불신의 시선들 속에서 그녀는 살아갈 용기를 발견해냈기 때문이다.
라스트 신.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도 물었고 헤세도 물었다. 어찌 쉽게 답하겠는가.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데 왜 살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창동도 모르고 물론 나도 모른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삽니다'라고 말해버리면 외려 쉬울 지 모른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누구나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라스트신은 물음표다.
"사는 게 참 힘들어, 세상은 왜 나에게만 자꾸 등돌리는 거야? 왜? 난 왜 살아가야 하지?"
그렇게 온 몸에 힘이 빠진 채 길을 걷다 횡단보도에 걸려 섰다. 햇볕은 짜증날만큼 눈부시고 건조한 대기는 가슴을 짓누른다. 정면을 응시할 힘도 없어 고개를 떨군다. 멍한 채로 바라본 그 곳. 아무런 내용도 없고 아무런 맥락도 없는 무의미한 공간. 거기에 내린 한줌 햇살과 그림자조차 그 어떤 의미도 되지 않는다. 그저 "왜?"라는 나의 물음만 떠돈다. 잠시 후 파란불이 들어온다. 사람들이 등떠밀며 재촉한다. 나도 그 틈에 섞여 흘러간다.
영화가 응시한 마지막 장면은 바로 이런 공간일 것 같다. 멍한 시선으로 바라본 무의미한 공간. 각자의 머리 속에 무수한 질문들만 남기는 그런 공간. 페이드 아웃.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난다. 그 틈에 섞여 나도 극장을 나선다.
세상은, 삶은 여전히 물음표다. 다만 우리는 그 물음들을 지워버릴 뿐이다. 머리카락이 자라 지저분해지면 가위로 잘라내듯이, 슬픈 기억들을 쉬 지워버리듯이, 삶에서 얻는 골치 아픈 질문들은 그냥 잘라내버리면 그만인 거다. 지울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직무유기 중인 신이 내린, 그나마 쓸만한 선물 일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