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전공시간에 이 영화가 거론된 적이 있었다. 이 영화를 만든 나라에서는 ‘개 같은’이라고 말하는 게 좋은 뜻이라고 해서 아직도 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잉마는 어린 나이지만 사색하기를 좋아하는 소년이다. 엄마와의 행복했던 시간을 회상하며 그리워하지만 지금의 엄마는 몹쓸 병에 걸려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잉마는 여자친구의 아버지에게 불순한 행동을 한다고 오해받고, 심지어 방화까지 저지르는 실수를 해버린다. 더 이상 엄마가 잉마를 관리하긴 힘들 것 같다고 판단하여 그는 시골에 있는 삼촌네 집으로 보내진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나오는 나레이션은 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다. 특히 몇 번이나 강조된, 우주선으로 보내진 강아지 이야기는 마치 잉마의 이야기와 흡사하다. 그렇다. 그 강아지는 인류를 위해 희생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우주선에 들어가서 굶어죽고 싶지 않았을 거다. 그건 자의가 아니라 강제적으로 들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잉마 또한 자신의 애완견과 여자친구, 사랑하는 엄마와 함께 집에 있고 싶었지만 그는 강제적으로 시골로 가게 된다. 그러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스탠 바이 미>나 <허공에의 질주>가 밝은 영화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 영화에 비하면 사실 단순하다. 적어도 그들이 성장하는 계기에 있어서 누군가가 희생하지는 않으니까. 결국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피해 없이 스스로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니까. 그렇지만 이 영화는 기어코 엄마라는 존재를 죽게 만든다. 엄마가 죽고 나서 그는 다시 시골 삼촌네로 보내진다. 그는 더 이상 어렸을 적 잉마와 다르다. 어린나이에 감당하기 너무 힘들었을 텐데 그는 내색하지 않는다. 오히려 삼촌내외가 혼자 지내는 할머니와 같이 자지 않겠냐고 말했을 때 결국 그는 승낙해버린다. 그의 인생은 우주선에 보내진 개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결국 인생이라는 건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얽히고설키는 관계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후반부로 가면서 그는 강아지 흉내를 낸다. 샤카(?)와 복싱 경기를 할 때도 그는 미친 것처럼 강아지 흉내를 낸다. 그리고 오두막집으로 달려 들어가 역시나 개 흉내를 낸다. 다음 날, 삼촌이 찾아가자 그는 결국 마음속까지 참았던 울분을 터트린다. “왜 엄마는 날 싫어했죠?” 그 물음에서 사실 찡했다. 엄마와의 행복했던 시간을 추억하던 잉마는 엄마가 병에 걸린 후로 자신을 멀리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자신을 시골로 보내야했는지, 왜 결국 죽어서 떠나야했는지 어린 나이에 잉마가 감당하기엔 너무 힘든 과정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 과정을 거친 잉마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골생활에 적응해가기 시작한다. 결국 이웃집 할아버지의 망치 소리는 여전하고, 단합이 잘되던 마을 주민들 또한 다같이 라디오 소리를 경청한다. 결국 변한 것 없다. 단지 옛 추억과 죽음에 관한 사색만을 하던 잉마는 그저 다른 열두 살 아이들처럼 낮잠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결국 엄마의 죽음으로 그는 이제까지 쌓아왔던 울분을 토해내고 한층 성숙해진 것이다.
결국은 엄마와의 행복했던 추억은, 단지 추억에만 머물러 끝나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사실 이제 내년이면 나도 성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사회로 나가야한다. 누나는 이미 미국으로 가버렸다. 요즘 따라 누나가 봉숭아물을 내 손톱에 들게 해줬던 누나와의 추억이 생각난다. 누나와 나는 이제 각자 어른이 되서 예전처럼 행복하게 놀 수 없다는 생각에, 이제 몇 년 후면 각자 가정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남몰래 눈물을 쏟아낸 적이 있었다. 나도 잉마처럼 의젓하게 성장할 수 있을까? 아니. 이미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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