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John Cusack이란 배우를 상당히 좋아합니다. 일단 그의 전작들인 사랑도 리콜이 되
나요(High Fidelity), 세렌디피티(Serendipity), 아이덴티티(Identity)가 다 평균 이상을 했던 영화
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그의 신뢰감 가는 인상과 특유의 발성(?)도 좋아하기 때문
이죠. 이번 1408도 순전히 그와 사무엘 L. 잭슨이 나오는 호러/스릴러라는 이야기 하나만 듣고 기
대감에 차 있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그러다가 몇몇 기대 이하라는 혹평들을 접한 후 그 기대가 살짝 반감되기도 했으나, 워낙에 기대
가 컸던 탓에 그래도 기대감 충만하여 영화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영화
는 기대를 한 것 이상으로 만족스러웠습니다. 간만에 소리에 의한 쇼크 효과가 아닌 심리적 압박
감으로 보는 이를 끊임없이 괴롭히며 공포를 선사하는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는 신선함과 희열도
있었고 무엇보다 존 쿠잭과 사무엘 잭슨의 연기도 좋았습니다(사무엘 잭슨은 생각보다 출연 시간
이 너무 적었지만..비중으로 치면 결코 작지 않았지요). 이 영화를 보고 재미없다는 사람들이 의외
로 꽤 있는 것 같은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잘못된 기대를 갖고 영화를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
습니다. 이 영화는 셔터 같이 관객에게 단편적 쇼크를 주면서 놀이기구 타는 듯한 공포를 선사하
는 영화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스릴감을 기대하고 봤다가는 정말 지루할 수도 있는 영화
죠. 이 영화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주인공의 1인칭 시점에 푹 빠져들어 그에게 감정몰입을 하
여 주인공의 상황에 동참(?)해보는 것입니다. 그런 시점에서 영화를 보게 된다면 악마적인 1408호
의 심리적 공포에 빠져들고도 남기에 충분할 것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살짝 살짝 있습니다..)
시놉시스는 간단합니다. 딸의 죽음 이후 흉가나 저주받은 호텔 따위를 돌아다니며 싸구려 공포
소설을 써가던 한 작가 엔슬린에게 절대로 돌핀 호텔 1408호에는 들어가지 마시오 라는 엽서가 날
아오게 됩니다. 때마침 귀신들린 호텔만 골라서 찾아다니던 엔슬린은 흥미를 느끼고 1408호에 묵
을 계획을 세웁니다. 완고한 호텔지배인 Olin의 반대와 만류에 부딪히지만 법적인 문제까지 들먹
이며 엔슬린은 끝끝내 50명 이상을 자살로 몰아간 1408호에 투숙하게 됩니다.
아무 문제도 없어보이는 평범한 호텔방으로 위장했던 1408호는 갑자기 켜지는 요상한 라디오시
계와 함께 60분 타이머를 시작하며 그 악마적 본성을 서서히 드러내고 주인공을 점점 괴롭히기 시
작합니다. 어떨 때는 순수한 공포심을 유발하는 겁주기 작전으로, 때로는 주인공의 아픈 상처를
후벼파는 상처주기 작전, 때로는 그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추궁하기 작전 등으로 주인공을 죽고 싶
게 만들다가 주인공의 탈출로를 하나씩 하나씩 끊음으로 인해 최악의 절망상태로 서서히 이끌어
가는데..
일단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 중에 하나는 호흡 조절에 뛰어나다는 점입니다. 별 사건 없이 다소
길게 흘러가는 초반부는 다소 지루할 수도 있으나, 주인공의 캐릭터 형성을 위해서 그 정도의 시
간은 필요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류의 원맨쇼 영화에서는 관객이 주인공 캐릭터에
아무 애정을 갖지 못하면 정말 장황한 영화가 될테니까요. 그리고 1408호에 들어가기 직전 섬뜩한
호텔 매니저 Olin의 완고한 만류와 설득, 그 호텔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참혹한 사진자료 등은 이후
에 나타날 공포와 스릴에 대한 기대를 점차 상승시키며 무서운 장면 없이도 보는 이를 서서히 긴
장하게 만드는 묘한 재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본격적으로 1408호가 그 악마적인 면면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부터 역시 영화는
논스톱으로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 그 공포적 장치를 배치함으로써 웰메이드 호러 영화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특히 조금씩 조금씩 탈출과 생존의 희망을 앗아가며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과정이 압
권이지요. 그리고 그 공포적 장치에 관객이 다소 익숙해져 둔감해질 무렵, 영화는 갑자기 모든 것
을 종식시키며 "이게 뭐야?"라는 느낌을 잠시 주었다가, 다시 반전을 제시하며 관객과 주인공으로
하여금 최악의 절망과 공포 상태를 느끼게끔 만듭니다. 원작 소설을 읽어보지 않아서 이러한 호흡
조절의 공을 작가 스티븐 킹에게 돌려야 할지 감독에게 돌려야 할지는 잘 모르겠군요.
John Cusack의 연기는 역시 뛰어납니다. 사실 영화 분량의 3/4 정도에서 혼자 연기를 해야 하는
거의 모노드라마에 가까운 시추에이션에서 그는 원맨쇼를 훌륭히 해냄으로 인해 다소 우스꽝스러
울 수 있는 상황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듭니다(이미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에서 이런 모
노드라마 류의 연기에 능하다는 것을 증명해보인 적이 있죠). 사무엘 L. 잭슨은 몇 안 되는 장면에
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부각시킴으로 인해 역시 "그"라는 느낌을 갖게 하지요. 그가 연기하지
않았으면 아마 초반부는 진짜로 지루하기만 했을 지도 모릅니다.
"링" 이후로 간만에 제대로 된 공포영화를 본 것 같아 즐거웠습니다. "샤이닝" 이후 스티븐 킹 원
작 영화 중 최고작이라는 현지 언론의 평은 과장이 아닌 것 같네요(물론 "샤이닝" 이후 스티븐 킹
원작 영화들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떨어졌기 때문이 아닌가도 생각되지만.."쇼생크 탈출"은 장르
자체가 다르므로 열외). 물론 깜짝 놀래키는 장치들이 다소 부족하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 따라 재
미없을 수도 있는 영화인 건 확실한 것 같지만..생각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치켜세우는 "링" 같은
영화에도 막상 귀신이 나와서 깜짝깜짝 놀래키는 장면은 몇 안 되지요..당분간 혼자 호텔 방에 묵
는 일은 피하고 싶네요..허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