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아주 즐겨 하는 편은 아니지만 게임 원작의 영화들은 꽤 여러 편 봐 왔다. <슈퍼 마리오>, <스트리트 파이터>부터 해서 <모탈 컴뱃>, <툼레이더>, <레지던트 이블 1,2>, <에이리언 VS 프레데터> 등등. 사실 원작 게임의 완성도가 탁월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영화로 옮겨질 경우에 그 완성도에 있어서 인정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게임이란 게 아무래도 플레이어 개개인에 의해 게임 진행의 방향이 좌지우지되는 만큼 스토리에 있어서는 부실한 면이 많고, 영화화하는 과정에서도 게임이라는 매체의 속된 말로 속도감있게 "뿅뿅거리는" 특성을 극대화해서 그런 부실한 스토리를 커버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원작 게임이 갖고 있는 고유의 스릴(플레이어가 주인공이 되어서 돌아다니는 실감나는 느낌)도 놓치면 안되기 때문에 제대로 영화화하기가 쉽지 않을 때가 많다. 앞서 본 영화들 중 대부분이 그랬고.
하지만 그 중에서도 <레지던트 이블>의 경우에는 비교적 큰 호응을 얻은 게임 원작 영화인데, 그것은 원작이 갖고 있던 밀폐된 공간들을 통과하면서 느끼는 긴장감을 속도감과 겸비해 잘 살렸을 뿐 아니라, 레이저로 인체를 깍둑썰기해주는 초유의 기술도 선보이면서 영화로서 보여줄 수 있는 현란한 비주얼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게임 원작 영화는 원작 게임이 갖고 있는 메리트와 영화로서 보여줄 수 있는 메리트를 동시에 갖춰야 하는, 은근히 쉽지 않은 직업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 <사일런트 힐>은 꽤나 매끈하게 나온 물건이라 할 만하다.
로즈(라다 미첼)와 크리스(숀 빈) 부부에게는 입양했지만 온 정성으로 키우는 딸 샤론(조델 퍼랜드)이 있다. 그런데 딸 샤론은 매번 잠을 잘 때마다 몽유병때문에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바깥을 돌아다녀 부부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더구나 샤론은 돌아다닐 때마다 자신의 집인 "사일런트 힐"에 갈 거라고 울부짖는다. 이 몹쓸 병을 치료해야겠다는 생각에 로즈는 샤론과 단 둘이 샤론이 그토록 입에 달고 다니던 "사일런트 힐"이라는 마을에 가보기로 결심한다. 크리스는 이 마을이 어두운 과거를 지닌 유령마을이라는 걸 알고 말리려 따라나서지만 이미 로즈의 결심은 막을 수 없다. 그렇게 사일런트 힐로 향하던 중, 로즈와 샤론이 탄 차는 도로 위를 걷던 웬 소녀와 마주치며 사고를 일으킨다. 잠시 의식을 잃고 있다가 깨어난 로즈. 그러나 옆에 타고 있던 샤론은 사라지고 없다. 딸을 찾기 위해 차에서 내려 "사일런트 힐"로 향한 로즈는 재가 눈처럼 내리고 안개로 가득한 마을 속을 헤매게 된다. 그러다 갑자기 울리는 사이렌. 그 사이렌 후에는 마을이 형언할 수 없는 흉측한 광경으로 뒤바뀌며 온갖 이상한 괴물들이 로즈를 위협하기 시작한다. 목숨을 걸 각오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든 로즈는 이 알 수 없는 현상들과 비밀이 담긴 마을 속에서 딸을 찾기 위해 함께 따라온 베넷 경관(로리 홀든)과 함께 사투를 벌이기 시작한다. 한편, 아내와 딸을 찾아나선 크리스는 경찰과 함께 마을을 뒤지기 시작하는데, 뭔가 을씨년스런 분위기로 가득찬 마을 분위기에 대단한 사연이 있음을 직감하지만 형사는 이를 밝히기를 꺼려한다. 과연 이 안개와 침묵으로 가득한 마을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이 되는 게임을 해본 적은 없지만 그 명성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가끔 인터넷이나 TV를 통해 본 게임장면에서 이 게임의 대략적인 분위기가 잘 느껴졌는데, 그것은 이 게임이 호러를 표방하고 있지만 시각적 자극과 속도감,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개인기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뿌연 재와 안개처럼 앞을 알 수 없는 막막한 느낌,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는 고요한 듯 숨막히는 긴장감이 키포인트였다고나 할까. 게임이라고 마냥 "뿅뿅거리는" 대신 차분하게, 그래서 더 소름끼치게 공포감을 건네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그런 게임의 특성을 잘 이어받은 듯하다. 이 영화도 자극적인 비주얼이 많은 호러게임이 원작인지라 헐리웃에서 맘만 먹었다면 <레지던트 이블>마냥 속도감 있는 액션으로 마을을 헤집고 다니는 액션물로 뒤바뀔 수도 있었겠지만, 다행히 감독 및 제작자들은 이 영화는 그렇게 만들면 쫄딱 망한다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듯하다. 정말 이 영화는 근래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 중에 가장 빼어난 영상을 자랑한다. 마냥 스타일리쉬하거나 속도감 있는 영상으로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전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영화는 정적이다. 적막한 안개를 배경으로 조용히 재가 눈의 형세를 띠며 내려 앉는 장면은, 분명 섬뜩하고 을씨년스러운데도 대단히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마치 수묵화 속 안개에 싸인 마을을 그리듯, 안개에 둘러싸인 영화 속 사일런트 힐의 풍경도 스산하면서도 서정적인 느낌을 배가시킨다. 마지막 로즈가 최종 관문으로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피로 얼룩진 공간마저도, 특유의 고요함과 절제된 분위기로 인해 끔찍해도 끔찍하게 보이지 않는 오묘한 느낌을 선사한다.
이렇게 우울하고 음침하면서도 아름답다는 느낌이 드는 건 심지어 영화 속에서 여러번 등장하는 크리처들도 그렇다. 특히 가장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무쇠 피라미드 인간(편의상 이렇게 부르겠다)의 풍채는, 그 살벌한 근육과 무지막지한 칼의 크기, 자비심없는 손놀림에 절로 겁을 먹으면서도 그 당당하면서도 거침없는 아우라에 절로 감탄사가 나올 만하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두꺼비 간호사(그냥 생긴 게 왠지 두꺼비를 연상시키길래;;)의 모습도 꽤나 인상적이었다. 착한 몸매를 소유한 간호사들이 마치 각기춤을 추듯 행위예술을 하듯 단체활동을 하는 모습이 섬뜩하면서도 흉칙함과 아름다움이 조화된 그들의 비주얼이 마냥 무서운 느낌이 아닌 뭔가 매력적인 섬뜩함을 안겨주었다. 이외 시도 때도 없이 울어제끼며 사람을 뜯어먹는 아기 크리처나, 몸 안에서 강산성 물질을 분비하는 왕꿈틀이 크리처들은 음산하고 정적인 마을을 배경으로 등장해 찝찝하면서도 흡인력이 있는 그로테스크한 포스를 잔뜩 풍긴다.
또 하나 이 영화가 정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대목은 영화 중 유난히 암전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수시로 사이렌이 울리면서 그저 을씨년스럽던 마을은 대놓고 잔악무도한 마을로 뒤바뀌는데, 영화는 이런 분위기의 급전환 속에서 관객들에게 쉴새없이 확 몰아치지 않는다. 사이렌이 울리고 마을이 압도적인 어둠으로 뒤덮이는 순간. 스크린은 잠시 어두워지며 암전상태가 된다. 그러면서 눈 앞에 펼쳐지는 막막하기만한 지옥도. 영화는 대놓고 롤러코스터같은 짜릿함을 주자는 게 아니라, 한 템포 쉬었다가 서서히 눈을 뜨듯 뒤바뀐 마을의 참혹한 풍경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도 역시 그 어둠 속에 갇혀 헤매는 듯한 고요하고 적막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게임 원작이라고 해서 쉴새없이 오락성으로 밀어붙이는 일방적 흐름을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게임이 보여줬던 고요함 속의 잔혹함, 아름다우면서도 끔찍한 악몽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영상화하면서 게임 원작 영화로서 관객이 기대하는 바를 상당히 효과적으로 만족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게임 원작답게 정말 게임을 하는 듯 점차 높은 레벨로 향해 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는 점도 없지 않다. 로즈가 한정된 공간 속에서 크리처들을 피해 도망다니는 모습이나, 후반부에 딸을 찾기 위해 마지막 비밀을 향해 접근하는 장면에서 정말 어드벤처 게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병원의 지도를 외워 통로를 따라가는 모습(이런 식의 퍼즐 종종 등장하지 않는가) 등은 마치 영화를 보면서 관객도 게임을 하는 듯한 묘한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또한 때때로 단서를 던져주던 비밀이 후반부에 가서 한꺼번에 풀리면서 호러 영화로서 절정의 고어 비주얼을 보여주는 전개도 오락적인 면으로서 충분히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한다. 결말에서야 밝혀지는 반전도 생각보다 허무하지 않다.
사실 이 영화는 대사 내내 "난 딸을 찾아야 돼요", "가요"와 같은 단순한 대사들이 반복되고, 지옥이 된 마을을 헤매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중심이 되는 터라, 스토리가 앞뒤 완벽히 짜맞춘 듯 탄탄하거나 하는 부분은 기대하기 어렵다. 샤론과 사일런트 힐에 관련된 사연이 뭔가 복잡할 것 같은데 그게 후반부에 가서 한꺼번에 밝혀지기 때문에 머리 속으로 정리하기가 다소 벅찰 수도 있다. 다만, 이 영화의 확실한 미덕이라면 몸이 반쪽으로 찢어지는 잔혹한 장면마저도 어딘가 범접하기 어려운 카리스마를 발휘할 만큼 관객을 힘있게 사로잡는 "분위기"가 있다는 것이다. 고요한 침묵과 더불어 서정적이라고 해도 될 만한 아름다운 비주얼을 선보이다가도 그 속에서 유혈 낭자한 살육을 벌이고, 그 속에서 또 악몽같이 슬픈 사연을 끄집어내기 때문에 단순히 피 튀기고 마냥 쉴새없이 달리기만 하는 호러 영화의 분위기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게임 원작 영화로서의 충실함을 넘어서, 부조화적인 요소들을 절묘하게 섞어 상당히 기묘한 매력을 선사하는 호러 영화로 발돋움하지 않았나 싶다. 다른 건 둘째치더라도 관객들로 하여금 아름답고 끔찍하며 슬픈 비주얼에 빠져들게 하는 것, 이것 만으로도 이 영화는 상당히 기특한 일을 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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